왕복이 되는 여로를 가니까

12일 기준 서울 17곳에 있는 소녀상, 이 중 11곳을 8일부터 14일까지 돌아다니면서 상태와 의미를 파악하는 글을 썼다. 우연히, 정말 영화의 극적인 장면처럼 만난 시민활동가 한 분을 알게 돼 35도에 육박하는, 햇볕 내리쬐는 대낮의 인터뷰를 더해 두 편을 완성했다. 회사가 통신사인 탓에 기본 업무를 하면서 추가로 써야했기에 완성도가 얼마큼 나왔는지 장담할 수 없었으나 굳이 써야겠다고 느낀 까닭은 ‘어제나 그제, 그끄제에도 계속되는 생각’인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 지 모르는 까닭에.

삶은 여행이라, 아침 출근하는 길부터 퇴근하는 땀 냄새 가득한 버스까지 모든 시시때때가 생경하기만 한 세상에서, 여전히 우리는 그래도 살아가고 있으니까. 불란서와 덕국, 선가파가 아니라도 하루씩 편도로 떠났다가 왕복이 되는 여로를 가니까. 우리는 적어도, 우리는 적어도.

해뜨는 방향에서 복이 올 때까지

그날의 기억은 뚜렷하다. 내 얼굴이 신문 1면에 할머니들과 함께 났던 탓이다. 흔치 않게 사진부 동기가 내 사진을 찍어준 탓이다. 무척 더웠던 탓이다. 한바탕 소동이 났던 탓이다. 게다가 내 몸이 아팠던 탓이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여럿이 부딪혀서 내 오른쪽 뺨이 찢어진 탓이다. 그리고, 그런데도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고 땡볕에 서울 종로구 청운동까지 걸음을 걸었던 탓이다.

벌써 2년이 흘렀다, 멀것만 같던 시간이다. 그날 더위 기억이 선명한데, 사람은 영화가 됐고 영향이 됐고 별이 됐다. 김 형은 영화감독이 됐다, 1000만 관객이 들어도 쉽게 웃지 못할 기록을 들고.

질문도 물리력을 받는지 방향과 세기가 있는데, 어떤 이들은 사실만 보라고 한다. 눈 앞의 것만 봐서는 다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누군가 말하는 ‘사실’은 무엇인가. 다시 질문만 늘어지는데, 시간이 잘게 쪼개져서 흐르고 있다. 돌아오지 않을 분초가.

(사진 출처 : 한겨레)

언 고개

삶이 때때로 무료하거나 시시하다거나, 회의적일 때에 치중하는 사람들과 말을 섞을 때 나는 외롭다. 이미 애가 탔고, 쉽게 말하는 이들의 선택은 아직 초연하지 못한데 비교 대상을 굳이 정해 객관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판별하려는 자에게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아마 시차 때문일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까, 아직 해가 넘어가지 않았다. 레프 톨스토이의 파홉에게 아직 기회가 있는 것이다. 힘겹게 달음을 하고 와서 거울을 보니, 그것은 나였다. 여전히 욕심 안에서 춤을 추고 있던 셈이다. 고개를 넘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하나의 환상이었나. 그곳은 빙벽氷壁이었다. 하나의 표시였다, 우리가 여전히 개똥밭에 있다는.

선진은 강 옆에서 물고기를 잡으려다가 포기했다. 거기에는 어떤 규칙이 있었다. 수업협동조합에 가입해야 했고, 또 잡을 때마다 세금을 내야 했다. 수협 가입에 대한 지연地緣과 쓸모없는 정치, 치밀하게 알아야 하는 시행령과 세칙은 뒤로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때로 포기의 위대함에 대해 자존심을 벌이다가 결국 발가락만 젖게 하고 있었다. 물이 불어 발목이 잠기고, 그제서야 한恨의 춤을 출 때 선진은 조심스럽게 깨달았다. 세계가 팽창하는 동안 가문비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빛이 오는 방향을 쳐다보다가,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렵게 묻고

어떤 ‘사실에 기반한 글’을 쓸 때, 몸이 아프다. 가슴이 아프다거나 마음이 저리다는 것은 사실 신체의 반응을 수반한다. 실제 혈관이 수축하면서 심근경색이나 편두통을 불러 일으키거나 심각한 지경에는 눈물도 제어가 되지 않는다. 심장이 빨리 뛰거나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한걸음씩, 조금씩, 앞으로. 아니, 내가 앞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체體 지구에서 우리는 각자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어떤 사람이,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에는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하지만, 우리는 어렵게 묻고 쉽게 대답해야 하니까.

남의 것과 내 것, 감정과 사실 사이

어떤 글을 짓기 위해 사실을 갈고 붙일 때 무척이나 오래 걸리는 경우가 있다. 내 것은 오롯이 내게 책임과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남의 것에 손을 댈 때는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최근 과학수사 교육에서 만난 K대 K교수는 그걸 ‘편집증’이라고 했다. 우리같이 글자를 모아 문단을 꾸리는 치 들에게 흔히 있는 증후라 했다. 나는 그걸 조금 꺾어서 증세症勢로 바꿔 불러 보기로 했다.

동료 중 하나는 ‘남의 일’에 슬퍼하지 않았다. ‘남의 죽음’도 안타까운 것일 뿐이거나 빨리 지나가야 하는 사건 중 하나라고 했다. 틀리지는 않은 말이었다. 일은 쏟아지고, 나는 취사선택 해야만 했다. 그것은 때로 어떤 집회에 귀를 대지 못하거나 어떤 아스팔트에 남은 흔적을 보지 못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것을 무척 잘아는 이들 중 몇몇은 서울 영등포구로 눈길을 돌렸고, 때로는 멀고 먼 산귀퉁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사실의 글’을 써서 밥을 벌어 먹었다는 선배 중 몇이나 농촌으로 들어가버렸다는 이야기를 바람 속에서 듣고는 했다.

오히려 감성적인 게 때로 나를 아프게 했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내 알 바 아니’지 못해서 이불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회사에서 내게 빌려준 컴퓨터 타자기에 한숨이 못처럼 박혔다. 담배를 태우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나았다. 머리 위에 구름을 이고 다닐 게 아니면. 언제고 천둥이 치고 비가 흩날릴, 그런 여유를 가질 새가 아니라면.

그래도 써야겠어서, 남기고 박아야 하니까, 다시 몸을 일으키고 증세를 겪었다, 병의 이름표도 보지 못하고.

글은 여러 번 ‘보류’를 당한 끝에 무덤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어떤 문장은 치열하게 다투고서 혓바닥 아래에 다시 잠식 시켰어야만 했지만, 또다른 어떤 바이트Byte를 빚다가 내 것은 무엇이 남았나 잠시나마 고민해봤다.

우주SPACE를 두번 두드리는 동안

홀로 쓴 글에는 언제나 우주가 있다. 그것도 여러 개. 새 창을 목표를 두거나, 때때로 그것 없이도 내밀한 중심으로 들어가지만, 집宇과 집宙은 대다수의 엄지 곁에서 생으로 자랐다.

공간은 어떻게 우주가 돼 가는가. 우리는 결국 알지 못하고 각자도사各自圖死할테지만, 가슴 속에 품은 암흑물질 탓인가. 근심과 걱정, 기우로 우리는 종교의 땅과 번식의 본능, 측은지심을 세웠다. 타나토노트Thanatonautes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선을 위해 살고 있는가. 망상과 허구에서 탈출하고 있는가.

좋은 글은 쉽게 읽히고 이해시키는 문장들이라고 했으나, 미려하지 못하게 나찬아 그마저도 어렵다.

우주를 두번씩 두드리면서 꿈을 바이트로 담다가 결국 고민만 담고 말았다. 내일 해봐야겠다.

엄마에게는 부채가 있다

엄마에게는 부채가 있다. 그건 사실 엄마에 대한 것만 응축된 게 아니다. 내 첫사랑인 외할머니와, 대전 현충원에 계신 그의 짝에 대한 죄송이 뒤섞인 감정이다.

대학생 시절, 용돈에 몇 푼 더한 아르바이트 삯을 더해 연애를 꾸려가던 때가 있었다. 집에 다녀가려면 4만원이 필요해서, 어쩌면 그것은 핑계를 삼아가면서 그 돈을 청춘에 썼다. 후회할 필요 없이 아름다운 내 생이지만 그 중 하나의 때는 굳이 삭제하고만 싶은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집으로 뛰어갈 것을 그랬다. 피곤이나 사랑을 핑계로 다음 차를 타지 말 걸 그랬다. 그 앞 차를 탔으면 외할아버지 가시는 길에 큰 절을 드릴 수 있을 것이었으나 굳이 그 차, 밤 10시20분쯤 고속버스에 몸을 올리느라 나는 힘이 없는 외할아버지 손만 잡을 수 밖에 없었다. 온기는 여전했으나 스스로 쓰다듬어주지 못한 팔을 빼앗아 잡고 엄마가 그렇게 우는 모습을 뒤에서 허무하게 쳐다보다 자학했던 날에서 시간은 강산을 바꾸고 날아와 때때로 꿈 속에 앉았다.

내 고향 항구에는 노을이 긴 공원 아래 그때를 전후로 케이블카가 생겼고 그 위에서 바라본 종고산과 중앙동, 군자동 풍경 앞에서 내가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것은 시작이야 어떻게 됐건 그들에 의해 발현되었던 것인 셈이 됐다.

당신의 말 마디는 여기 이 글과 내가 틔운 온갖 육하원칙에 곳곳에 꿋꿋이 박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