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사를 줍는 일

가슴에서 열이 올라온다. 시릴 틈 없다. 뼈마디마다, 감을 때마다 눈앞에 슬금슬금 보이는 눈썹까지 행복으로 찬다. 좋은 기사를 읽을 때,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된다.

그것은 때로 슬프거나 분하고, 또 복잡한 심경이 일렁이는 문장과 단락, 글의 주제와 별개로 나에게 온다. 싫고 역겨운 주제마저 그러하여서 기자의 진심과 끈질김, 답답한 마음을 부여잡고, 끊긴 전화에 서운해하지 않고 다시 재통화를 누르는 뻔뻔함에서 나온 한 문장, 온갖 고초를 겪고 나왔지만 포털 업체의 뉴스면 주요 배치에서 빗겨나 조회수는 겨우 열 몇 개에 지나지 않는 굴욕 속에서도 피어나더라. 물론 이미 소위업자가 된 지 한참인 내가업에서 떨어진 완벽한 일반 독자일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이런 기사를 주워 읽고 갈무리하는 것은 내 빈 시각 조그만 즐거움이 됐다.

정보 통신망에서 잘 읽히는 글은, 잘 읽히는 길이는, 잘 읽히는 제목과 그에 필요한 사진은 분명 있을 것이다. 온전하게 깔리는 것 자체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고, 불가능하다. 편집된 체계 속 놓쳐버린 부분이 있다면 그 글을 찾는 것 또한 능력, 그 맥락을 채워 넣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은, 요새 들어 괜한 자괴감과 우울함에 휩싸인 내게 좋은 자극제가 되고 있다.

오늘도 좋은 글을 찾고 있다. “언론사도 회사다. 어떤 도리도 하지 않을 수는 없잖니라며 아쉬워하던 어떤 선배를 따르지 않기로 한다. 넘쳐나는 언론사와 언론인 양 포장한 광고사, 속보 경쟁하지 않는 어떤 언론(굳이 언론사와 언론을 분리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나 생존을 고민하면서도 특기 없이 같은 파도를 기다리고 있는 미디어 사이에서 여전히 나는 춤을 추며 이삭을 줍고 있다.

여름, 생의 꿈

오늘 아침은 유난히 밤 같았다. 이른 밤이면 선선한 감각이 피부 끝부터 느껴진다. 곳곳이 시려 온다. 굳이 달리면서 공기와 내 몸을 마찰시키지 않아도 센 바람이 나를 덮친다. 우연이었을까. 간지도 모르게 여름이 가고, 가을도 따라 달음 박하고 오늘은 겨울이 왔다.

온도뿐만 아니라, 빛 또한 밤 같았다. 커튼을 치지 않았다. 요새 해가 짧아진 탓에 새벽에 짙은 빛이 내 방을 껴안지 않는다. 나 또한 그 덜한 빛이 슬프거나 고깝지 않아 그저 그대로 둔다. 눈을 떠 보일러 눈금을 보니 방은 16도, 이제 일어날 만한 시간이 됐다.

아침이면 한참 고민에 빠지던 날이 있다. 노래를 잔잔히 틀어두고 지금껏 걸어온, 다시 돌릴 수 없는 날들을 머릿속에 돌려본다. 아날로그 35mm 포지티브 필름을 꽂고 슬라이드 영사기로 내 날들을 벽에 크게 띄워 보듯이, 그것들은 확대됐다 줄어들기를 반복해. 어떤 날들은 내게 크게 맺혔다가 줄어들고, 어떤 시간은 가장 좁게 압축돼 있다 불현듯 가슴 속으로 달려온다.

그것들이 나를 만들고 있다. 만든다기보다 ‘그게 나를 만든다’는 생각이 나의 곁에 오래 있다.

아침에 맞춰 둔 종鐘은 모두 다섯 차례 나를 때린다. 인공지능 확성기도 나를 부른다. 추억이 다시 해마 안으로 퇴근한다. 다시 먹고 마시며, 여러가지를 묻고 답해야 할 당장을 견딜 때. 두 겹의 이불과 전기 담요, 후드티가 감싸고 있던 몸을 일으키다 여름이, 여름이, 찬란하고 우리를 감싸던 빛이 지나쳐 간, 아직 무의식에 들지 못하는 과거가 남았다는 게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느껴졌다. 행복한 그 날. 굳이 모든 날이 행복하지 않았다 해도 내게 남은 순간은 모두 뜨거웠는데. 지금은 겨우 영상 십 육도. 바깥은 영상 일 도에요, 라고 인공지능 확성기가 내게 말해준다.

계절은 시간을 따라 다시 오겠지만, 그 여름은 그 여름뿐이었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