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를 앞두고, 빛나는 해 아래 수심이 그림자를 만든다.

조사. 찾고 있다. 기록과 기사, 또 사진과 영상. 회사에 와 처음으로 르포르타주를 쓰게 됐다. 뻔한 소재, 가제를 뽑고 다듬을 수 있는 내 선의 일이 아닌 듯 해 마음만 답답하게 쌓고 있다.

남들도 다 하는 거다. 후배들도 몇 편씩이나 쓰고 만들었다. 적당히 걸 수 있는 이야기, 어떤 언론사에서든, 계속 바뀌는 기자마다 한 번씩 건드릴 수 있는 ‘이야기 기록’에 이다지도 궁리만 하는 것은 너무 좋은 르포를 많이 읽었기 때문인 게 가장 큰 이유일 거다.

모 종합지의 르포를 읽는다. 내일 준비할 소재와 전혀 상관없지만 선후배 기자들이 보낸 시간이 쌓인 기록이다. 담담하게 적은 글씨는 시詩도 아닌데 운율이 나고 꽃도 아닌데 향이 난다. 어떤 작가는 ‘한국 문학은 조사에 달렸다’는데 문학도 아닌 글에서 은, 는, 이, 가, 도, 과, 와, 를 따위가 묘기처럼 수를 부린다.

사실 그보다 큰 노력은 기자에게 필요치 않을 거다. 아니, 사실 그것만이 전부다.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거창한 말까지 꺼내지 않아도 과장은 악을 품고 은폐는 죄를 대는 것이다. 쓸 수 있는 ‘내 말’은 필요하지 않다. 점점 깨닫고 있다.

필요한 것은 정리하는 기술이다. 쓸데없는 잔가지를 털어내고 주어와 동사, 주제와 뿌리가 이어지게 하는 일. 그렇다 하면 우리 일은 하루하루가 정원사와 같다가 또 의사와 맥을 함께 하는 것일까.

내일 쓸 글 궁리를 하다 내 삶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와 마주했다.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가. 뒤돌아 고쳐야 할 글을 쓰진 않는가. 앞치마도 수술복도 입지 않았지만, 다리에 잔가지가 묻지 않았는지 또 연 배에 바늘을 두지 않았는지 형태소와 어미語尾의 머리채를 잡고 고민하다 어느새 새 날이 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꿀에게 배운 사랑

여전히 바람이 불고 꿀냄새가 나는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바람은 텁텁하거나 아직 조금 답답해서 그런지 사랑은 오지 않았다. 사람도 그러했다.

꿀을 산 적 있다. 꿀은 단 맛 그 이상의 깊이를 내게 준다. 아플 때, 몸이나 마음이 아플 때 마시는 꿀물, 채소와 함께 먹는 꿀의 맛은 전혀 다르고 느낌 또한 그렇다. 벌은 온갖 무덤을 다니며 꽃의 생을 퍼 나른다. 먹이가 있으니 완전 갈취는 아니래도, 어쨌거나 우리가 꽃과 벌에게 부채負債로 얻는 맛은 신身과 영英의 신비를 담고 있다.

부모님을 제외한 사람들과 큰 선물을 주고 받지 않는다. 단체, 이를테면 런클럽이나 대학 시절 소위대외활동으로 만난 사람들의 모임 등에는 값있는 물건이나 재화를 기부하기도 하지만 특정 개인을 지정해 선물을 주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다.

그런 내가 사람에게 꿀을 선물한 적 있었다. 시장에 들러 할아버지한테 아카시아꿀과 밤꿀, 유채꿀 등 설명을 듣고 고심해서 한병을 샀다. 무거운 그걸 낑낑대며 들고 찾아가 무거워보인다는 그에게 들려 보내고서 조금은 뿌듯하다고 생각했지만 그후로 오히려 그와 멀어지고 지금은 생면부지의 관계가 됐다. 그에겐 그게 생경한 일이었나 보다. 아니면 그에게는 그저 한 병의 꿀이라 생각 됐을지도 모를 테니까.

되돌아 생각해보면 그게 마음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 처음 나를 떼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어떤 마음을 써도 결국 그건 내 선의 일이구나, 감정이 닿는 것과 마음이 이어지는 것은 별개의 것이구나, 하는 것들. 사람의 마음은 나의 노력으로,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구나 하는 그런 것. ‘내 노력 따위로 바뀔 것이라면 애초에 그 노력조차 필요 없는 것이구나.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써 보았자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생각해보니 본능 또한 그렇잖아.

상처 줄 일을 만들지 않으려 애쓰고, 상처받지 않으려 애쓴다. 노력해서 사랑을 쟁취해내는 그런 순간은 만들지 말자. 결국 텁텁한 이 공기를 뚫고 내 순간도 언젠가 올 테니까,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 어떤 황홀한 편지도 필요없이, 그때는 바람이 불고 꿀냄새가 날 것이야. 열대야를 뚫고 오는 바람은 텁텁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