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틈까지 보여주어야 할까

절룩거리는 사람이 많은 백림의 월요일, 사람들은 어제의 영광을 무게로 기억하려는 듯 모두 무거운 쇳덩이가 달린 목걸이를 매고 다닌다. 차가운 그것을 꺼내 나도 조용히 목에 걸었다.

어디까지 얼마만큼 친해야 지인 아닌 친구가 될까. 어느 틈까지 보여주어야 할까. 속내를 숨기거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쉽게 재단되지 않아서 하나로 모아버렸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이란 것은 절박한 만큼 생을 여는 듯 하다.

어제 내가 그랬다.

옆 사람 토드에게 젤리를 나눠주었다. 로마 어디에 오면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고 있으니 목걸이를 가지고 오란다. 릴리의 할아버지에게 콜라는 얻어 마셨다. 손녀가 방금 지나갔다며, 힘을 내라고. 한국의 성 ‘김가’와 비슷한 킴이 내 허벅지를 마사지했다. 힘겨워서 다리가 덜덜 떨리는데 “너는 강하다”며 “기도하겠다”고 마사지 크림이 범벅인 손으로 내 손을 잡아쥐고 짧게나마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물론 그들과 따로 서울 용산 청파로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마나 백림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서울에 알고 지내는 사람보다 그의 얼굴이 더 각인될 것 같은 기분은 무엇인가. 이 글로 기억의 조각을 덧붙이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자연이든 우연히든 ‘언제 한번 보자’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든 한번 본 이’라서 그러는지.

물론 안다. 이것은 사는동안 그렇게 쉽게 나눠버릴 수 없는 간극이라는 것을. 사람은 매순간 바뀌고, 매초 우리는 변명을 계속하고 있으니까. 찰리가 잠든 이 곳에서, 백림의 바람으로 쓴다.

마음을 더해준 덕연, 수진, 인선, 유희, 주아, 혜민, 다혜, 웅기, 지은, 석, 은선, 지연, 예진 그리고 세현에게 감사를. 노보, 진주, 혜린, 대희, 순양, 진경, 제임스에게 축복을.

나는 지금 백림에 도착했다

“선생님이 마지막이네요. 뒤에 있는 줄은 다음 게이트인 에어프랑스 타는 줄이거든요. 혹시 섞일까 봐 직원들이 소리 지르고 다녔어요.”

10시 40분 비행기인 줄 알고 느긋하게 줄에 서서 제주도에 사는 가수의 노래를 듣다가 큰일 날 뻔한 오전, 눈 떠보니 나는 어느새 ‘호수의 땅’ 수오미에 있다. 중국 텐진과 베이징, 몽골 울란바토르와 바이칼호를 낀 러시아 이르쿠츠크, 북극해가 코앞인 노비우렌고이, 백해와 마주한 라르한겔스트를 지나 발트해. 백림까지는 앞으로 한 시간. 다시 독일을 찾기까지 11년이 걸렸다.

2007년, 백림의 추억은 거기에 살고 있다. 따뜻해져서, 호기 있게 사랑이나 하고 있던 나는 친구 A, 선배 B와 함께 호기롭게 부산 금정구 장전동의 한 여행사를 찾아 숙소와 비행편을 예약했다. 수학능력검정시험 ‘물이 덜 빠져’있던 나는 사실 구라파에 대한 동경을 달리 품지 않았다. 지구가 작아져서, 이제 집에서도 책이나 영화, 온라인으로 구라파에 대해 ‘그렇게 찬란하다는 문명의 젖줄’에 대해서 알 수 있다며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

오히려 걱정은 돈이었다. 엄마의, 사실 아빠의 돈과 내 노동사입의 날을 빌어 한 달을 보내는데, 10년이 지나 지금 내가 벌고 있는 돈으로도 감당 못할 소비에 천착해야 한다는 사실은 수능에 실패하고 학점조차 수렁에 빠진 나에게 부끄럽고 조심스러운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면 좋았을까. 그해 나는 아르바이트로 ‘나름’ 돈을 열심히 벌었고, 동생과 두 살 터울인 탓에 그해에는 대학 등록금이 한 명치만 필요했다. 엄마와 아빠도 가본 적 없는 구라파다. 엄마는 감사하게도 내 통장에 돈을 넣어줬다.

그렇게 한 달 반을 집 떠난 삶을 살았다. 가장 사진 실력이 많이 늘었던 때 호기롭게 돌아다닌 섬과 대륙 곳곳은, 사실 그쯤 유행하던 이십 몇 개 나라 일주같은 유행의 코스 일부였지만 행복과 좌절은 곳곳 도처에 있었다. 한없이 평온함에 가까워지던 로마, 여전히 골목 하나까지 기억하는 니스, 공창을 처음 보고 놀랐다가 성욕이 전혀 생기지 않아 더 놀란 암스테르담.

백림은 중간에 있었다. 쾰른과 뮌헨, 때마침 지역 축제까지 겪으면서 “Original or Black”만 고르라면서 1ℓ들이 맥주잔을 권하던 아저씨들은 온갖 소매치기에 겁을 먹던 우리의 안정제가 돼줬고, 살찌는 소리가 들릴 지경일 때도 긴장과 함께 허리띠도 풀어버린 탓인지 우리는 소시지를 삼키고 마음을 먹었다.

첫 유럽 여행은, 그러나 웬일인지 나에게 회의감만 선물했다. 모나리자를 보고 에펠탑 앞에서 김동률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환상인지, 어떤 게 괜한 욕심이고 어떤 게 필요충분에 의한 것인지 고민이 깊었던 것이다.

그 생각은 관광을 수업으로 들으며 오히려 커졌다. 공항은 권력이고 항공과 노선은 정치였고 그렇게 생긴 부대 산업은 경제 그리고 이것들이 거미줄처럼 얽히면서 강력해지는 탓에 어떤 이는 고향의 고유한 것을 잃어버린다는 수업을 들으며, 한참 오랫동안 항공 노선을 뒤지기도 했다.

호기심, 사유가 인간을 여기까지 오게 했다지만, 질문에 대한 질문만 반복하던 나는 그후 한참이나 오랜 기간 여행을 피했다. 피했다기에는 너무 많은 곳을 다녔지만 특별한 장소에 대해서 특별한 기분을 느끼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가고 있었다. 굳이 어딘가를 다녀왔다며 자랑하듯 읊는 것도 마찬가지로.

여러 이유로 1년을 준비한 백림행이 좌절되게 생긴 적이 3번이나 된다. 마지막 비행기표를 취소할 때는 씁쓸한 기분마저 들었다. 사흘 밤낮을 고민하고 백림행을 선택하고서 빈 통장 잔고만큼은 아니겠지만 웃음이 났다. 다시 결국 필요충분 때문에 여행하게 되는 것일까. ‘그냥 가보고 싶은 곳’이란 여전히 없어서, 이번에는 조금 두근대면서 떠날 수 있을까 했지만, 여전히 아직은.

그래도 조금 기대 된다. 조금씩이라도 낭만을 되찾을 이유가 생긴 탓인지, 아니면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서일지.

늑대 울음소리같은 브레이크 소음이 귀를 덮고 있다. 나는 지금 백림에 도착했다.

백림의 일상을 절반으로 잘랐다

9일에 떠나 19일에 돌아오는 백림의 일상을 절반으로 잘랐다.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다시 끊는 수수료는 40만원 남짓. 연차 사용도 절반으로 덜어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앞뒤로 잃은 것을 생각하면 200만원 가까이 되지만, 아쉬워하지 않기로 생각했다. 그러면 끝이다.

여전히 한양, 비행기가 돌아올 때쯤이면 머리에서부터 붉은 빗질을 시작할 인왕산이 보이겠지. 저마다 각자 삶을 사는 우리. 새삼스럽게도 이 삶의 끝에서도 사람이나 사회, 우주나 사랑에 대해서 여전히 모를 것 같다. 요새는 그런 생각이 많다.

서점에 갈까요, 서가를 돌까요

서점에 갈까요, 서가를 돌까요. 전과부터 낱말 풀이까지, 피천득부터 황석영까지 오래된 순서대로 울음을 울까요. 시대마다 살았던 나(들)이 어떻게 바람에 기댔는지 어디서 하늘을 한참 바라봤는지, 신을 고쳐 신는 척 하면서 둥그런 것을 만들어 씨앗처럼 몰래 뿌렸는지, 오래된 고궁을 보고 가슴을 때리거나 중구 정동에서 차로 된 벽을 밀고 당겼는지. 살아 마땅한 날은 없다며, 하루씩 쌓은 종이는 왜 이리도 무거운지, 그것이 기둥이 돼 책 숲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왜 어른이 돼 쓸데없이 키스를 하다 알게 될까요. 입술에서 종이 자르는 냄새가 날까요. 키가 클 나이는 이제 먹을 수 없고 아빠한테서 할아버지 냄새가 나는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납골당 앞에는 부처가 가부좌 튼 교회가 세워졌어요. 나이 먹어 깃털이 빠진 비둘기가 십자 위에 앉았다가 석고상이 됐어요. 먼데서 풍경 소리가 들리고 귀를 기울이니 파도소리가 뒤섞였죠. 삶은 왜 이렇게 뒤범벅이 될까요. 아랫집에서는 왜 신음이 날까요. 흐느끼며 움직이는 어깨가 지진이 됐는데 왜 우리 집은 홍수가 났나요.

자서전을 봤어요, 당신(들)이 쓰다가 찢어서 버린 것을 주워다 바느질 했어요. 책받침처럼 넙덕하고 들 수 없이 무겁고 커다란 책.

바람이 그걸 넘겨주죠. 저는 그저 가만히 서서 바람의 속도로 그걸 쳐다보고 있어요. 갈대처럼 조용히 가만히.

오래된 소음, 새 파도에 붙여

사회부 사건팀은, 어쩌면 정치부보다 오래된 부서일 겁니다. 언론이나 신문은 정당의 소식지에서 시작됐다는 게 제가 배운 것이지만 사람이 모이고, 함께 의견을 나누고 공동 의견을 주장하기 전에 이미 ‘언론이나 신문에 드러나지 않던’ 살인과 강간, 갈취와 협박 또 힘의 논리에 의한 다툼은 생존의 바닥에 있는 원초적인 것에 기생했다 생각하기 때문이죠.

사회부는 그래서 언론을 눈에 들인 사람들의 가장 중심에 있던 부서이지 않냐,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사회가 발달하고 금융이 생기며 정보기술(IT) 사회로 시공이 확장되는 시기에도 이어지는 것은 원초적인 사건들은 그 내면을 볼 수 있는 이 부서로 오게 된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서울 종로 혜화동 인근에서 시작해 북부지검, 북부지법을 거쳐 관악구와 서울대, 기상청까지 도착한 제 짧은 여정을 잠깐 중단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백기완 선생 와병 취재와 드루킹 추적, 미투(Me too) 관련 취재,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느낀 경이와 폭염, 태풍, 폭우로 이어지는 기록적 2018년 날씨까지 최전선에서 취재기자로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쫓았지만 쫓고 따져 묻고 길어 올리는 노력과 실력이 얼마만큼 자랐는지는, 글쎄요. 아직 걸음마 수준이겠지요.

하나 그래도 열심을 다했다 생각하는 쪽은 날씨와 환경에 관한 관심과 추적, 취재 정도일 겁니다. 학부 공부, 사회학을 열심히 했습니다만,인 지구환경과학을 적용해서 조금더 빨리 혹은 깊이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통신사 특성 상 빠르게 써야 하는 탓에 충분히 깊게 사료하지 못한 면도 있으나 자료를 읽고 분석하는 것을 바탕으로 쓴 내용에 대해 다양한 면에서 공을 일면 인정받았다 봅니다.

독립 언론이 아니고, 1인 미디어는 더더욱 아닌 ‘언론사’ 소속 노동자는 장단점이 극명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게 장점이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지요. 업무 안에서 운신의 폭이 타자에 의해 강제되지 않으나 행정적인 부분을 따라야 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이번 경우가 마지막에 해당하게 되는군요.

ICT로 갑니다. 분야까지 대략 정해졌으나 깊은 이야기는 차차 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본적은 사회부에 ICT바이오헬스과학부로 파견 형식이고, 전혀 관심이 없던 쪽이 아닌데다 언젠가 한번 혹은 제대로 열심히 해보고 싶다 생각했던 터지만 이런 식으로 파도가 올 줄은 몰랐군요.

서핑은 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지만, 이 파도는 타야겠지요. 가보지 않았던 길을 현실적으로 밟아야 할 시기라, 로버트 프로스트와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옳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