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하자

사진을 고르거나 글을 바르거나 아니면 삶을 틀 때

오래된 보도가 영상 플랫폼을 타고 나올 때 깜짝깜짝 놀란다. 모자이크 없던 시대, 쓰러진 채 나뒹구는 사람 곁에 마약 주사기가 보일 때 아니면 경찰서 유치장 앞까지 들어가 형사나 피의자와 이야기 나눌 때, 게다가 그게 인제 와서는 대기업 총수나 고위직 공무원 같은 사람이라면 그것은 통쾌함보다 의구심이 든다. 오래된 날에는 언론이 단순히 권력이었거나 권력에 천착했기 때문에 가능한 상황인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각에서 우리의 우방이라 불리는 미국의 경우에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모자이크는 물론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머그샷까지 널리 공유된다. 야사시やさしい의 나라는 오히려 단어까지 조심하고, 구라파는 경우에 따라 다르나 일단 인권을 우선에 두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테다. 그렇다면 이것은 세계사 안에 있는 문화적 배경 문제인가. 실상은 또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곳저곳에서 귀 기울여 본 데 따르면 그것은 돈과 용기의 문제다. 돈은 곧 소송이다. 용기는 얇은 막 같은 것으로 무형의 여론이 뒤를 지킨다 한들 그것은 펜대와 셔터 버튼, 녹화 키에는 붙어 있지 않으니 이는 다시 사람의 본성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정의를 느낄 수 있는 살갗, 불의를 응시할 수 있는 눈, 그런 것들일 테다.

그럼 그런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어떻게 길러지고, 언제부터 그는 용기를 쓸 수 있는가.

나는 그럼 어떠한가. 쓸데없는 생각을 여러모로 고민해봤다. 그래도 하자.

한 해의 하반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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