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단壇

삶은 유연하게 연결돼 있으나 그건 사실 분초가 층계를 이룬 것이었다. 수 미터가 넘는 벽돌을 쌓은 탑을 멀리서 보면 자른듯 한 피라미드 옆면이듯 이 단은 불규칙한 높이로 꾸려져 있다.

지난달 만난 손 형은 내게 “많이 부드러워진 듯 하다”고 말했다. 삶의 경륜이 생긴 탓은 아니지만, 근래 나 또한 어깨에 힘이 꽤 빠진 것을 느끼고 있다. 고교 시절 왕따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온 것인지, 극단적 선택으로 먼저 삶을 빠져나가버린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 탓인지, 아니면 체념 끝에 닿은 막장인지 알 수 없으나 나는 많은 면에서 이제 고민에만 있지 않고 활동으로 들어왔다.

찔러서 피가 나오지 않을만큼, 되돌아보면 내 삶 중 비교적 유려하던 때는 지방의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다시 감정기술이 절정에 올랐을 때는 파주의 어느 출판사에서 ‘주제를 잡아 글을 묶어보자’고 연락이 왔으나 나는 부질없이 참으로 완강했다. 그것은 보고 배우고 영향을 준 글 때문이었다.

매년 1월의 머리가 다가오면 내 심장은 쿵쾅대기 시작했다. 오래된 관습처럼, 그저 봄을 기다렸던 것이다. 신년의 벽두에 모든 얼굴을 밀어내고 팔리는 글은 그만의 생동감, 시대상, 글쟁이의 사활을 건 근면이 있었다.

그밖에도 좋은 글을 파는 사람들은 좋은 책의 얼굴에 이름을 올렸다. 매문은 때로 지청구를 들었으나 인류가 멸해도 글은 남을 것이라는 고집스러운 생각에 나는 매년 매달 여기저기 등기를 던졌다.

그래도 원칙은 있었다. 돈을 주고 글을 싣지 않을 것과 문하의 굴로 들지 않을 것, 또 제멋대로 글씨를 재단하지 않은 곳.

힘겹게 이제 겨우 기준만 맞췄으나 갈 길이 있기에 기뻐하지는 않으려 한다.

아래 이 말을 붙인다.

글을 간절히 팔아 밥을 연명하기 싫었다. 유명세에 따라 단가가 오르거나 내리다가 죽어서야 급등락을 반복하는 것이 가상의 화폐와 다름 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질과 양이 항상 비례하지 않았기에 두 글자 세 글자의 토씨는 더 어려웠고, 이 모든 고민은 허투루 날아가는 종이비행기처럼 불확실성의 상상 안에 있었다.

자유롭게 글을 짓고 싶었으나, 태어난 천성 탓에 그리하지 못했다.

이따금 불안했다. 글 안에서도 시란 참 꿈 같아서 잠을 자기 전에 공상空想에 올렸던 무른 낱말은 머리를 들 때면 뼈다귀도 남지 않게 박멸됐으니 버린 것이야 사라진 별 만큼이나 많다.

어떤 사람은 트라우마의 무게로 평생을 버티는데, 내게도 몇 개 비밀이 있다.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냈으나 1980년대 시대가 빚은 장남, 장녀가 만나 이룬 가정에서 큰 탓에 가지게 된 다툼의 기록. 싸늘해진 외할아버지를 종국에 안지 못했던 비운. 현철이형과 부산대 윤 선생, 케이블 방송 이 선배를 먼저 보낸 격정激情.

모든 무게와 우려를 들고, 이제 이 단壇에서 한 걸음 나가려고 한다. 사랑하는 세현과 아빠, 또 엄마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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