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닮이나, 지성이에게

예닮, 아니 지성아. 네가 세상에 나오기를 너무나 기다렸단다. 나는 이 시간을 20년쯤 참아왔지. 남 흉보는 것이나 몸, 마음에 나쁜 것을 참으면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던 것도, 때로 ‘어디에나 좋은 사람은 어느 곳에도 없다’는 핀잔을 들어오면서도 굳이 눈 감아도 좋을 위법, 이를테면 아무도 없는 새벽 3시 퇴근길 차 없는 이면도로 횡단보도 앞에서도 푸른 등을 기다리는 그런 날도 굳이 인도 앞에서 발등을 치면서 지켜온 탓은 오직 너를 기다려왔기 때문일테야.

엄마는 여전히 천방지축인데 우리는 이제 어떤 형태의 가족이 됐단다,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고 주변이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그런 사랑의 형상. 나와 엄마는 이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이니. 아니면 청년이라는 얇은 막을 깨고 이제 막 아브락사스를 향하고 있는 것이니.

삶은 유연하게 구부러지고 때때로 눈물처럼 꺾인단다. 물론 그것보다는 웃는 날이 많으나 우리 쉽게 떼어질 수 없게 됐으니, 예닮이나 지성아. 세상이 우리를 잡아먹기 전까지 함께 모험을 떠나는 것이야.

보물보다 보물이고, 사랑보다 사랑인 예닮이나, 지성아. 한발씩 같이 가볼래.

사태의 편린

M을 사랑했을 때 나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가 원한 것은 내가 아녔다. 아주 조그만 조각, 그것만 바랐다.

글로 밥을 지어 먹는 이가 되고 싶어서, 글자와 문자의 무덤부터 바다까지 떠돌던 시절 나는 많이도 편지를 썼다. 노래를 불러서 녹음해 들려주기도 했고, 어떤 이야기라도 참새 지저귀듯이 들려줬다. 그가 원하면 그를 따라갔고 그의 일도 얼마간 내 손때를 묻혔다.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엑셀로 이것저것 꾸미는 것도 힘을 보탰다. 한창 젊은 시절이라 그랬던가, 그래도 몇 달씩 그렇게 지냈다.

사람인지라 힘에 부칠 때가 있었다. 지금의 고요를 찾게 되기까지 많은 역경과 고난을 지나쳤고, 느린 속도로 뛸 때도 있었다. 그걸 견디지 못했는지 M은 내게 어떤 위로도 없이 다른 이를 방에 들였다.

아무리 뒤져봐도 잘못된 것은 없었는데, 내 방에는 장송곡이 울려 퍼졌고 그의 방은 또 다른 질투의 장이 됐다.

P는 내게 자주 거짓말을 했다. 밥 먹듯이 했다. 얼굴을 볼 때면 하루에 3번은 했다는 이야기다. 욕도 심했다. 진영논리에 빠졌던 그는 흑백의 그림자를 오가면서 여럿을 박쥐 아니면 한심한 사람으로 몰아 붙였다. 당기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였다.

불안해서 그랬을까. 뻐꾸기 새끼처럼 그는 타깃을 계속 바꿔가면서 울타리를 세웠다. 알면서도 굳이 불편에 반응하지 않았던, 물론 부당한 것과 차별을 두기 위한 표현이다, 나는 자주 그 대상이 됐고 가슴 속에 응어리도 생겼으나 굳이 암이 되게 두지 않았다.

A는 아빠 이야기를 참 많이 했다. 그의 부친은 어느 기업 고위 간부였다. 인사 이동을 할 때면 인터넷 지면을 장식할 만한. 그가 이뤄낸 것도, 그의 아빠의 월급이나 기사 딸린 법인 차량도 내 관심사와 참 멀었지만 그는 그 이야기를 시시때때로 늘어놨다.

내가 관심있던 것은 단순했다. 우유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그가, 좋아하는 차가운 라떼를 마음껏 편히 먹을 수 있도록 그런 우유가 제공되는 커피 전문점을 찾는 그렇고 그런.

편을 만들어야 하나, 팀을 꾸려야 하나. 아니면 우리를 만들어야 할까. 고민만 깊이 파다가 아주 작은 웅덩이만 남겼다. 이것은 잘한 일일까. 거울을 보다가 고민이 쏟아졌다.

이런 이야기들은 일방적 주장이나 망상, 기억의 조작은 아니다. 2001년부터 오늘까지 빼곡히 쌓인 사진과 문서, 각종 파일을 뒤지다가 다시 떠올라버린 수년 전 사태의 편린이다.

나는 이것들을 자주 다시 봤다, 속칭 ‘정주행’. 기억은 지워지고 덧입혀지며 또 재구성된다고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싶었다. 상처부터 환희까지, 물론 내가 준 것들까지 모두 다.

왕복이 되는 여로를 가니까

12일 기준 서울 17곳에 있는 소녀상, 이 중 11곳을 8일부터 14일까지 돌아다니면서 상태와 의미를 파악하는 글을 썼다. 우연히, 정말 영화의 극적인 장면처럼 만난 시민활동가 한 분을 알게 돼 35도에 육박하는, 햇볕 내리쬐는 대낮의 인터뷰를 더해 두 편을 완성했다. 회사가 통신사인 탓에 기본 업무를 하면서 추가로 써야했기에 완성도가 얼마큼 나왔는지 장담할 수 없었으나 굳이 써야겠다고 느낀 까닭은 ‘어제나 그제, 그끄제에도 계속되는 생각’인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 지 모르는 까닭에.

삶은 여행이라, 아침 출근하는 길부터 퇴근하는 땀 냄새 가득한 버스까지 모든 시시때때가 생경하기만 한 세상에서, 여전히 우리는 그래도 살아가고 있으니까. 불란서와 덕국, 선가파가 아니라도 하루씩 편도로 떠났다가 왕복이 되는 여로를 가니까. 우리는 적어도, 우리는 적어도.

해뜨는 방향에서 복이 올 때까지

그날의 기억은 뚜렷하다. 내 얼굴이 신문 1면에 할머니들과 함께 났던 탓이다. 흔치 않게 사진부 동기가 내 사진을 찍어준 탓이다. 무척 더웠던 탓이다. 한바탕 소동이 났던 탓이다. 게다가 내 몸이 아팠던 탓이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여럿이 부딪혀서 내 오른쪽 뺨이 찢어진 탓이다. 그리고, 그런데도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고 땡볕에 서울 종로구 청운동까지 걸음을 걸었던 탓이다.

벌써 2년이 흘렀다, 멀것만 같던 시간이다. 그날 더위 기억이 선명한데, 사람은 영화가 됐고 영향이 됐고 별이 됐다. 김 형은 영화감독이 됐다, 1000만 관객이 들어도 쉽게 웃지 못할 기록을 들고.

질문도 물리력을 받는지 방향과 세기가 있는데, 어떤 이들은 사실만 보라고 한다. 눈 앞의 것만 봐서는 다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누군가 말하는 ‘사실’은 무엇인가. 다시 질문만 늘어지는데, 시간이 잘게 쪼개져서 흐르고 있다. 돌아오지 않을 분초가.

(사진 출처 : 한겨레)

언 고개

삶이 때때로 무료하거나 시시하다거나, 회의적일 때에 치중하는 사람들과 말을 섞을 때 나는 외롭다. 이미 애가 탔고, 쉽게 말하는 이들의 선택은 아직 초연하지 못한데 비교 대상을 굳이 정해 객관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판별하려는 자에게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아마 시차 때문일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까, 아직 해가 넘어가지 않았다. 레프 톨스토이의 파홉에게 아직 기회가 있는 것이다. 힘겹게 달음을 하고 와서 거울을 보니, 그것은 나였다. 여전히 욕심 안에서 춤을 추고 있던 셈이다. 고개를 넘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하나의 환상이었나. 그곳은 빙벽氷壁이었다. 하나의 표시였다, 우리가 여전히 개똥밭에 있다는.

선진은 강 옆에서 물고기를 잡으려다가 포기했다. 거기에는 어떤 규칙이 있었다. 수업협동조합에 가입해야 했고, 또 잡을 때마다 세금을 내야 했다. 수협 가입에 대한 지연地緣과 쓸모없는 정치, 치밀하게 알아야 하는 시행령과 세칙은 뒤로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때로 포기의 위대함에 대해 자존심을 벌이다가 결국 발가락만 젖게 하고 있었다. 물이 불어 발목이 잠기고, 그제서야 한恨의 춤을 출 때 선진은 조심스럽게 깨달았다. 세계가 팽창하는 동안 가문비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빛이 오는 방향을 쳐다보다가,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