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서, 울었다.

눈이 아픈 것은 1달쯤 된다. 이날 아침 나는 참 울었다. 두려움이 마음에 있었다. 글 짓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은 손가락이나 입보다 귀나 눈이 중요하다, 그다음으로는 코.

비의 냄새를 맡는다. 바람의 소리를 듣고, 낙엽의 울음을 느낀다. 다시 우환의 하소연을 듣거나 젖은 난간의 넋두리를 본다. 그리하여서 나는 살아있고 성장했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2011년 7월, 나는 자의에 의해서는 지금까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술을 했다. 눈을 내주는 것은 푸른 점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났으나 나는 그후로 오랜 시간, 지난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이걸 잃어버릴까 하는.

2016년 어느 날은 햇빛을 가리는 이른바 ‘블라인드’의 하단 봉에 왼쪽 눈을 맞아서, 당구대로 당구공을 치듯이, 각막이 일각 찢어지는가 하면 부러진 칼날이 속눈썹 바로 위를 때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지난 10년 내내 나는 선글라스와 청광 차단안경을 예비해서 살았다. 암흑은 견딜 수 없는 막장인 탓이다.

초등학교 1학년, 전남 여수 바닷가 마을의 교실 문을 열던 순간이 회상된다. 이게 회상인지, 기억과 기록을 통해 재구성된 상상인지 명료하지 않으나 난 이 반에서 처음 안경을 코 위에 얹고 나타난 어린이였다. 꼬마 과학자가 되고 싶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것저것을 만진 대가로 잃은 시력은 내내 고충의 일부였다. 중고등학교 때 친구와 싸우다 안경이 부러져서 허공에 주먹질을 한 것도, 수영을 하고 싶어서,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중학교에서 학교 대표로 대회를 나가서 포디엄에도 오른 바도 있지, 물안경에 도수를 넣을 수 있는지 알아봤던 것도 이 때문에 벌어진 조금의 수고다.

고민에 고민을 더해서 눈을 맡겼지만 그 뒤에 올 노화나 시력 저하에 대해 생각을 전혀 아니했던 게 아닌 탓에 그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싶어서 온갖 것을 해왔다. 그런데도 스스로 느끼기에 변화가 최근에 온 탓에 속앓이가 심했던 것이다.

최근에는 병원을 갔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피곤하거나 고민하는 일이 있느냐고 의사가 물었고 나는 머뭇거리다가 몇가지를 대답했다. 건조한 대화였고 밖에는 비가 내렸다. 적층형 피로와 적분된 불안이 갈대처럼 흔들거렸다. 이 도시에서. 업보를 인 이들이 흐르고 있었다.

바깥이 보였고, 나무가 흔들리는 광화문 옆에서 나는 보여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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