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의 단풍과 흰 깃발, 철호 형

작은 구멍가게에 얹혀살던 철호 형은 갱지에 만화를 그렸다. 글씨가 빼곡한, 사실 컬럼이나 사설에 그림 몇 개를 흘리듯 그린 그 만화는 하루 한 개씩 꼬박꼬박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점포에 배달되던 신문을 싸는 종이가 형의 캔버스였다. 형은 돈을 심하게 아꼈다. 신문 사이에 지역에서 꽂아 넣은 광고 전단지라도 발견할 때면 오후까지 입이 곡선을 그렸다. 그 입은 저녁 여덟시쯤과 대칭을 이뤘다. 형은 사실 돈이 없었다. 그쯤 배를 끌어안고 몸을 데구르르 말아서 잠을 청했다. 배가 고프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박철호라는 이름의 공벌레 인간이 화장실과 주인댁, 점방과 광庫房 사이에 그의 틈이 있었다.

주말에는 신문배달부가 오지 않는다. 주말자가 있으나 외진 그 동네에는 토요일 소식은 월요일 아침에 한꺼번에 배달된다.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다녀왔다거나, 목요일에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은 유력 정치인의 소식은 월요일이 되서야 수갑에 눈물을 왕 터뜨린 채 사진으로 박제돼 들어오는 고장이다. 철호 형은 주로 그들의 초상, 또 안타까운 노동자의 영정사진이 담긴 신문을 풀어서 가판에 까는 일을 맡았다. 1면에는 사社의 욕심이나 국가나 민족 같이 그와 관련없어 보이는 면면이 들어찼고, 뒷면은 전자 회사의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회사의 신제품 사진이 내걸렸는데, 형은 신문을 펼쳐 보는 법이 쉽게 없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간헐적인 단절이 있는 삶을 살았던 사내가 박철호다.

그가 떠오른 것은 내가 영실榮失군을 떠날 무렵이다. 신문 머리에 형의 이름 몇 글자가 나온 것 떄문이다.

몇 차례나 무얼 그리느냐고, 무얼 썼냐고 물어본 적 없었다. 주민등록증을 스스로 찢어버리고서 밥을 주면 밥을 먹고, 술을 건네면 고사할 줄 몰랐던 형은, 그렇게 수년을 보내면서 동네 소일을 도우며 산 너머를 이따금 한참 쳐다보던 형은 그 그림과 편지를 몽땅 싸서 군청 입구에서 그걸 하늘로 던지고 몸에 부싯깃을 지른 탓이다. 그 날은 영실이 생긴 이래 세 번째, 최근 10년 새에는 처음으로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군청을 찾은 날이다.

“니는 내 동생을 살려내라. 내 아비도 돌려 내라. 내 동생이 본 책은 내가 쓴 것인데, 내가 무지렁뱅이라고 그동안 보낸 편지가 환송돼 와서 여기 몽땅 가져 왔니라. 나와서 대답하기 전까지 니는 한걸음도 영실을 못 나간다. 그자들은 령실에서 나고 자랐는데, 무슨 노서아露西亞고 함흥咸興 핑계를 대느냐. 사람 속 찢어져서 열불 터지고 단풍드는 게 보고 싶은 게냐.”

그날 영실에는 초봄 단풍이 들었고 운동화를 끊어 신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할 일 있음 주소”라고 무뚝뚝하게 웃음 웃던 철우형은 신문이 된 날이다. 영실에는 그 신문이, 다시 날이 지나서 월요일 아침에야 깔렸다. 고장에는 적막이 돌았다. 집집마다 흰 깃발이 걸렸다고 했다. 뒷면이 코팅된 한 면짜리 갱지, 그 안쪽에는 철우형 입모양이 그려져 있었고, 윗쪽에는 하나 뿐인 눈알 그림이, 그 옆으로는 거의 비슷한 줄 글이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 태열이 보니라. 형이다. 너는 얼마나 힘들고 아팠느냐.”

#디의단상

햇살이 부서지는 속도, 악마가 애태우는 고장

1.
얕은 호숫물은 밑천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땅은 물을 끌어당기면서, 수중 식물의 뿌리를 적시려 했으나 물도 제 뜻이 있는지 위치를 지키려 애썼다. 그건 중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떨어진 하늘도 끌어서 제 이불로 쓰고 싶던 정상도 한없이 가장 꼭대기가 될 수 없듯이, 게서 들리는 울음은 슬픔의 것만은 아녔다. 잃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사랑만은 아닐 테다.

고요의 오름에서 나는 조금 눈물을 흘렸다. 안개가 걷히자 좁은 길이 보였다. 허리를 숙여야 볼 수 있는 자잘한 봄들과 얼음꽃, 또 누가 밟았을 잡초나 고목의 뿌리 같은 것에서부터, 진한 깊은 그런 삶의 틈이 열렸다. 외로운 마음은 추위에, 두려워하는 걱정은 산새나 사슴의 서걱거림으로 대치한다 치더라도 이 감정은 물과 또 오롯이 나만의 것이니, 이 시각 이 때에.

2.
오래전 어떤 사람과 어색한 창가가 떠올랐다. 여전히 나는 시시콜콜한 결정이나, 정의나 평범마저 이런 곳에 적거나 떠드는 데 우려가 큰 사람, 기우에 잃은 사람이 많아지지만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고, 아직까지는.

어떤 욕도, 어떤 사랑도, 어떤 그리움도 또 어떤 봄이나 겨울도, 맞지 않는 옷에 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말 밖에 없어서. 그렇구나, 힘을 내길 바라 또 감사해, 이런.

괜찮아, 악마가 애태우는 고장에도 빛이 흐르니까.

3.
정의正義같은 게 무엇인지, 몇 개 단어를 도려내 쓰다가 기치자記治者의 글을 보고 다시 풀칠했다. 도리道理(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와 우치愚癡(매우 어리석고 못남) 사이에 겨우 나를 뒀다.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아차夜叉를 보고 적고 물으러 가자, 사회를 깨부수려고 하는 그 어떤 27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