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씨, 울지 마. 아니, 울어도 돼.

삼남의 첫째로 태어난 선후씨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처절한 직장인이다.

서울의 한 명문 대학을 중간에 제발로 걸어나온 그는 군대를 다녀와서 곧바로 지방의 한 산업단지에 취직했다.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화염의 탑이, 갯벌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 치는 ‘돌의 꽃'(석화·굴)의 촉수처럼 세워진 유기물 처리소에서 그는 삼십년을 버티게 될 것이라고, 처음에 선후씨도 몰랐을 거다.

처음에는 연장을 들고 길을, 작업장을, 수백명이 한 데 모여 밥을 먹는 식당을 다니던 곳을 근처로 바른 도로가 깔리고 이내 항만이 생기고 또 공항이 생겼다. 화학 노동자들은 그게 이땅의 발전이라고 믿었고, 선후씨도 그 중 하나였을 게다. 대대로 좋은 물을 바탕으로 수산물이 풍부했고, 일본강점기 전후를 지나면서 밀수로 컸다고 하여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 다음 ‘물때’는 화학이 복사한 돈 다발, 그리고 광주에서 천안 야우리를 거친 사내(가수 장범준씨)가 ‘거시기한 밤바다 노래’를 부르면서 다시 탈바꿈한 도시에서 사실 그는 이런 변화 바깥에 있었다. 발전發展하는 것은 월급과 주량酒量뿐, 자녀가 커가는 것이나 동거인이 나이 들어 몸이 노쇠한 것은 뒤로 밀어 둘 수 밖에 없었다. 꺼지지 않는 ‘화염의 탑’을 생의 보루로 둔 탓에, 삼교대는 멈추지 않는 나태지옥 수레바퀴같았을 것이다. 어느날 그의 방에 암막 커튼이 달렸고 돌침대가 들어갔고 호텔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베개가 들어가 포개졌다.

그래도, 그럼에도 무어라도 해보려고 했던 사람은 가끔씩 소리 내 울었다. 늙었다는 증표는 아닐 게다. 스스로의 삶이 아쉬워서 눈물을 떨군 게 아니다. 그건 보통 해주지 못한 가욋일과 관련한 것이었다. 돈을 더 대주지 못해서, 더 좋은 교육을 내리 주지 못해서 아니면 충분한 시간을 함께 쓰지 못해서.

엊그제 일도 마찬가지다. 중고차를 보러 가서는 끝에 붙은 몇천원, 몇만원을 깎아보자며 아쉬운 소리를 하던 그는 차량 상태를 보다가 먼 곳을 보면서 조금 울컥한 듯 했다. 해주지 못한 게 생각나서다. 서쪽을 보면서, 창이 난 방향으로 눈을 올려 뜬 선후씨 눈가가 발갛게 달궈지는 것을 보았다. 햇빛이 강해서, 자신만의 감성에 젖어서 그러한 게 아니다. 그건 분명 아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보다 좀 더 과잉 감성적이 될 때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편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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