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kTheBlank 작성

욕심 없는 바람, 무리 없는 사랑, 얕지 않은 두터움

코로나19 감염기, 처음이자 마지막

4월3일, 어쩐지 으슬으슬한 기분이다. 어떤 삶이 좋은 것일까, 짧은 몽상에 잠겨있다가 나는 좋은 사람일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엊그제 다녀온 빈소 취재 때문일까. 어쩌면 근시일 마주하게 될 가족의 수술 때문일까. 콧물이 가끔 흘러서 2년 넘게 자주 갈지 않던 마스크를 하루 2번 교체했다. 자가 검사 키트 위양성률과 의료인용 검사 키트 양성률, 또 의료기구 업체의 PER을 생각하다가 문득 또다시 검사를 해봤다. 역시나 음성. 내침하는 것은 계절이 아니라 제 마음이듯, 코로나19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온갖 현장을 돌아다녔지만 한 번도 걸리지 않았고, 마스크를 잘 쓰고 있는 탓이겠지. 아니면 타지, 서울마저 떠나서, 생활하는 현실 때문일까.

4월4일, 어떤 이에게 월요일은 지지리도 맞이하기 싫은 일 년의 쉰두 번쯤이겠지만 그중 스무 번쯤은 눈감고 넘길 수 있다. 배울 수 있는 시간이라 그럴까. 그게 기사를 잘 쓰기 위한 혹독한 단련의 시간일지, 아니면 좋은 취재를 생각하기 위한 시간일지 모르겠으나 한참 모자란 나는 둘 다 들일 수 있는 시간이라서. 돈 받으며 매문하는 일을 ‘배운다’로 치부하면 무척 전문성이 떨어져 보인다, 굳이 영자를 섞어 예를 들면 ‘프로페셔널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 정도.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삶을 배워가는 입장에서는 배워서 익히며 돈을 빌어 받는 게 무척 행복한데.

어쨌거나 그러한 월요일을 맞이할 때쯤 평소 없던 가래가 낀다. 목이 서투르게 아프다. 무슨 일일까. 처음으로 자가 검사에 옅은 흰 줄이 생겼다. 줄이라고 볼 수나 있을까, 옅은 흔적 같은 것. 역 앞에는 천막이 광장을 껴안고 있었다. 코로나19 검사소다. 능숙한 솜씨로 코를 찌르는 간호사는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4월5일, 출근길 전에 대략 확진의 느낌을 받았다. 아침에 일어나려고 하니 누군가 내 목을 밟고 있었다. 목뿔뼈 아래부터 기도 앞까지, 고개를 든 뒤에도 누군가 목을 옥죄고 있었다. 급히 세수하고 출근했으나 ‘음성입니다’라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어떤 게 목을 쥐고 있더니 또다른 게 뒤통수를 쿵쿵 두드리기 시작했다. 확신이 들 때쯤 문자가 왔다. 집으로 가야한다. 가방에 항상 가지고 다녔으나 뜯지 않았던 의료 수준 마스크를 뜯었다. 서울 중구 국립의료원 취재 당시 받았던 것이다.

사실 언젠가 어떻게 걸릴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돌아다니는 직업 특성상 언젠가는 걸릴 텐데, 혹은 이미 걸렸다가 항체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또 백신 휴가를 받지 못했으니 며칠이라도 쉴 수 있었으면 했다. 걸리고 나니 헛소리였다, 그런 것은.

집 오는 길에 비대면 진료를 예약했다. 확진판정 전부터 알고 있던 서비스다. 의료계 안팎에 큰 우려와 이해관계가 겹친 그 서비스로 약부터 짓고 나니 보건소에서 문자가 들왔다. 2개 연이은 내용으로 보낸듯한데 뒷부분만 와서 전화를 걸었다. 역학조사를 기록하고, 한숨 돌리기 시작했다. 로봇청소기가 바닥을 쓸었고, 나는 이불을 털고 어두운 방에 누웠다.

4월5일, 상태가 악화됐다. 이제 목 위에 한명, 가슴 윗쪽에 한명이 서 있다. 목 위에 서있는 이는 물구나무를 서있는 것일까. 손톱이 목젖을 긁는 느낌이다. 숨을 쉴 때 소리가 났다. 입맛이 없다. 식욕·식탐 조절 제재인 비만치료제를 먹은 기분이다. 다행히 우울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아플 뿐이다. 그럼에도 입이 원하지 않은 음식을 배는 원해서 몇 개 주워 먹었다.

4월 6일과 7일, 가래가 심해졌다. 이때문에 출근할 때보다 빨리 깼다. 가래가 목에 끓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어딘가에서 누워서 침을 뱉던 어떤 할아버지처럼 침대에 기역 자로 엎드려서 가래를 뱉었다. 처절한 고통이다. 강하지는 않아도 나름 질기다 생각했던 체력이 부서진 기분을 느끼며 소리 내 숨을 쉬었다.

천만 명이 걸렸다. 이만 명 가까이 유명을 달리했다. 아는 많은 이가 걸렸고, 언젠가 걸려도 이같은 고통이 올지 몰랐다. 편차가 크다고 했으나 변이 거듭해 감기와 비슷한 수준이라 했던 어느 공직자 말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 있나. 유사 이래 대규모 질병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나는 어떻게 될까. 앞서 걸렸던 가족처럼 큰 일 없이 조용히 낫길 바란다. 그러나 또 알 길 없다. 그래서 몇 자 적어두는 것이다, 나는 어땠다는 걸. 아직 오늘 살아있고, 나는 몇 개 사랑했던 순간을 생각했다.

문득 여섯 해

주말 오전, 밀렸던 박사과정 대학원 수업을 듣고 과제를 끄적이다가 불현듯 사월의 도래를 알았다. 벌써 찼구나, 여섯 해라는 시간이.

민영뉴스통신사와 손잡고 일하기로 한 것은 직업인으로서는 꽤 큰 도전이었다. 원래 함께 일하던 회사가 굴지 대기업으로 인수 소식이 업계를 떠돌았고, 결국 그에 준하는 곳에 인수되며 적지 않은 연봉 인상 또 금전적 이득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고 별리하는 것은 어쩌면 일견 무모한 도전이었으리라.

더욱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이 회사 안에 자리를 잡고 일을 시작하던 몇 달 만에 벌어진 일 때문이다. 담당 부장은 모 대선 후보의 싱크탱크로, 선임은 일간지로 또 다른 선배는 또 다른 대선 후보 격 캠프로 떠나면서 그야말로 ‘청계천 오리알’이 됐다.

옮긴지 얼마 안돼서도 심리적 갈등이 계속됐다. 모 기자 추천으로 보게됐던 종합편성채널 최종 면접은 사달로 끝났다. ‘할 말 있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대학원 졸업까지 딱 1년만 병행하고 싶다’고 대답했고 당연히 그럴 여력 없었던 정치부장과 경영지원실장 입꼬리가 쭉 내려가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붙더라도 옮겼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말은 할 필요 없었다. 행동이면 됐을 거다.

두 번의 대선, 여러 번의 사건과 사고 또 행복했던 기억이나 차가운 분노 같은 것은 나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엊그제 또 크게 혼나면서, 여전히 많이 부족한 나를 되뇌었다.

어떤 면은 닳았다. 배나 시야에 기름이 끼었다. 아직 솥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물 온도가 오르고 있던 것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 한겨레 L 기자나 조선일보 K 기자, 문화방송 W 기자 등의 젊은 시절을 보고 이 판에 끼길 바랐다. 나는 잘 보았던 것일까, 의구심도 커진다. 의심하는 게 배부른 소리일까

길게 쓰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언제나 무엇보다 부족한 게 시간, 피로의 해소력.

여전히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나 계단 맨 앞 끝자리. 부끄러워서, 지금 하나 바라는 것은 부끄러운 데를 함께 채울 의지의 익명 같은 거.

일단 살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