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기 해부학, 감정흔

나는 심부를 절개하면서, 새 사랑이 떠나길 바랐다. 이 사랑은, 이미 질린다. 질겨서 잘리지 않은, 뜯어내야 하는 잔인한 계절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논리의 어깨 너머. 지금 쓰는 글자에 감정이 담기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감정을 도려내 저울 위에 올리는가. 저울에 올려 결국 실험실에 수치로 박제될, 나의 감정흔은 어떻게 설화가 돼 가는가. 이 세기가 지나가면 나는 오해를 탈피하는가. 문 앞에서 나는 울다 무릎을 꿇었다. 양 다리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하나의 단壇

삶은 유연하게 연결돼 있으나 그건 사실 분초가 층계를 이룬 것이었다. 수 미터가 넘는 벽돌을 쌓은 탑을 멀리서 보면 자른듯 한 피라미드 옆면이듯 이 단은 불규칙한 높이로 꾸려져 있다.

지난달 만난 손 형은 내게 “많이 부드러워진 듯 하다”고 말했다. 삶의 경륜이 생긴 탓은 아니지만, 근래 나 또한 어깨에 힘이 꽤 빠진 것을 느끼고 있다. 고교 시절 왕따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온 것인지, 극단적 선택으로 먼저 삶을 빠져나가버린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 탓인지, 아니면 체념 끝에 닿은 막장인지 알 수 없으나 나는 많은 면에서 이제 고민에만 있지 않고 활동으로 들어왔다.

찔러서 피가 나오지 않을만큼, 되돌아보면 내 삶 중 비교적 유려하던 때는 지방의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다시 감정기술이 절정에 올랐을 때는 파주의 어느 출판사에서 ‘주제를 잡아 글을 묶어보자’고 연락이 왔으나 나는 부질없이 참으로 완강했다. 그것은 보고 배우고 영향을 준 글 때문이었다.

매년 1월의 머리가 다가오면 내 심장은 쿵쾅대기 시작했다. 오래된 관습처럼, 그저 봄을 기다렸던 것이다. 신년의 벽두에 모든 얼굴을 밀어내고 팔리는 글은 그만의 생동감, 시대상, 글쟁이의 사활을 건 근면이 있었다.

그밖에도 좋은 글을 파는 사람들은 좋은 책의 얼굴에 이름을 올렸다. 매문은 때로 지청구를 들었으나 인류가 멸해도 글은 남을 것이라는 고집스러운 생각에 나는 매년 매달 여기저기 등기를 던졌다.

그래도 원칙은 있었다. 돈을 주고 글을 싣지 않을 것과 문하의 굴로 들지 않을 것, 또 제멋대로 글씨를 재단하지 않은 곳.

힘겹게 이제 겨우 기준만 맞췄으나 갈 길이 있기에 기뻐하지는 않으려 한다.

아래 이 말을 붙인다.

글을 간절히 팔아 밥을 연명하기 싫었다. 유명세에 따라 단가가 오르거나 내리다가 죽어서야 급등락을 반복하는 것이 가상의 화폐와 다름 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질과 양이 항상 비례하지 않았기에 두 글자 세 글자의 토씨는 더 어려웠고, 이 모든 고민은 허투루 날아가는 종이비행기처럼 불확실성의 상상 안에 있었다.

자유롭게 글을 짓고 싶었으나, 태어난 천성 탓에 그리하지 못했다.

이따금 불안했다. 글 안에서도 시란 참 꿈 같아서 잠을 자기 전에 공상空想에 올렸던 무른 낱말은 머리를 들 때면 뼈다귀도 남지 않게 박멸됐으니 버린 것이야 사라진 별 만큼이나 많다.

어떤 사람은 트라우마의 무게로 평생을 버티는데, 내게도 몇 개 비밀이 있다.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냈으나 1980년대 시대가 빚은 장남, 장녀가 만나 이룬 가정에서 큰 탓에 가지게 된 다툼의 기록. 싸늘해진 외할아버지를 종국에 안지 못했던 비운. 현철이형과 부산대 윤 선생, 케이블 방송 이 선배를 먼저 보낸 격정激情.

모든 무게와 우려를 들고, 이제 이 단壇에서 한 걸음 나가려고 한다. 사랑하는 세현과 아빠, 또 엄마에게 이 글을 바친다.

그래도 하자

사진을 고르거나 글을 바르거나 아니면 삶을 틀 때

오래된 보도가 영상 플랫폼을 타고 나올 때 깜짝깜짝 놀란다. 모자이크 없던 시대, 쓰러진 채 나뒹구는 사람 곁에 마약 주사기가 보일 때 아니면 경찰서 유치장 앞까지 들어가 형사나 피의자와 이야기 나눌 때, 게다가 그게 인제 와서는 대기업 총수나 고위직 공무원 같은 사람이라면 그것은 통쾌함보다 의구심이 든다. 오래된 날에는 언론이 단순히 권력이었거나 권력에 천착했기 때문에 가능한 상황인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각에서 우리의 우방이라 불리는 미국의 경우에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모자이크는 물론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머그샷까지 널리 공유된다. 야사시やさしい의 나라는 오히려 단어까지 조심하고, 구라파는 경우에 따라 다르나 일단 인권을 우선에 두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테다. 그렇다면 이것은 세계사 안에 있는 문화적 배경 문제인가. 실상은 또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곳저곳에서 귀 기울여 본 데 따르면 그것은 돈과 용기의 문제다. 돈은 곧 소송이다. 용기는 얇은 막 같은 것으로 무형의 여론이 뒤를 지킨다 한들 그것은 펜대와 셔터 버튼, 녹화 키에는 붙어 있지 않으니 이는 다시 사람의 본성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정의를 느낄 수 있는 살갗, 불의를 응시할 수 있는 눈, 그런 것들일 테다.

그럼 그런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어떻게 길러지고, 언제부터 그는 용기를 쓸 수 있는가.

나는 그럼 어떠한가. 쓸데없는 생각을 여러모로 고민해봤다. 그래도 하자.

한 해의 하반기가 시작됐다.

편의점 도시락 값이 100원 오른 게

가만히 앉아서 해가 지는 소리를 듣다가, 아니 내가 우주를 나는 분위기를 느끼다가 점심에 즐겨 먹어 온 편의점 도시락값이 최근 한 달 새 100원 오른 게 떠올랐다.

편의점은 오래된 슈퍼들을 박멸시키고 건물 아래 자리를 잡았다. 뱀이나 도마뱀이 자신을 키우기 위해 허물을 벗는다 했던가, 점방들은 모두 간판을 던지고 기업의 물류로 옷을 갈아 입었다. 그쯤부터 등장했던 게 1980년대부터 있었다던 ‘슈퍼마켓 도시락’.

내가 처음 편의점에서 먹은 도시락은 3100원인가 그쯤 했다. 그걸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2011년과 2012년, 줄기차게도 편의점 도시락을 먹어대서다. 비싸질 만큼 비싸져서 이제는 라면, 냉면이 1만원권 한 장으로 되지 않을 지경에 다다랐고, 편의점에도 이런 값의 한 판이 등장했으나 그쯤에는 여느 식당 메뉴의 반 값이면 한 끼를 때울 수 있었던 터라 언론사 입사 준비와 대기업 공개채용을 한꺼번에 준비하면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뛰던 내가 좋은 ‘영양섭취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낀 돈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 들어갔다. 기업에 입을 떼기위한 차비로 쓰였다. 때로 취업과 결혼을 벌써 잡은 이에게 둘다 손에 없는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축하의 티켓이 됐으나, 지금보니 참 부질없었다. 그중 절반은 이미 연락이 오래 전 끊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였던가. 편의점에 들어가면 항상 밥값이 궁금해서 돌아보는 게 습관이 됐다. 이 따위 사견으로 공공을 위한 글을 짓진 않을 테지만 이 틈바구니에도 4~5년 사이 참 많은 게 변했다. 2개를 하나로 묶어 파는 삼각김밥은 천천히 종적을 감췄고, 1500원이 넘는 것도 생겨났다. 샐러드가 생겼으나 왠지 모르게 도시락보다 비쌌고 파스타나 짜장면같은 게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느새 값은 천천히 올라 있었다.

가격표를 새로 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사이 천사들이 붙였던 김밥의 가격표는 과거 1000원에서 최대 4000원여까지 택갈이됐고 찌개나 볶음같은 것은 아예 ‘2인분부터’라는 단서까지 덧붙여 1만 8000원이 됐다. 월급은 개미의 눈물에 움튼 이끼에서 탈락한 이파리처럼 조금 올랐지만 말이다.

값이 올랐다는 게 싫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언제까지 어떤 방법으로 또 왜 이 뜨거운 반도가 변해가는지 편의점 식탁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친구가 없고 점심시간이 급한 데다 돈이 너무 궁해서 이런 버릇이 생긴 것은, 전혀 아니다.

이름표

내가 구입한 이름표가 여러 개 있다. 이름은 내가 만든 혹은 우리의 것이라도 이름표에는 값이 붙는다. 도메인이나 서버, 아니면 상품이나 정신, 단체의 장長 자리. 누가 정신에 어떻게 값을 붙이냐고 말한다면 “사실이 그래” 쉽게 답한다.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돈이 들고 위인을 기억하는 데도 결제가 필요한 시대인데 굳이 아닌 척 할 필요가 있나.

여러 단계를 지나 오늘의 각자가 됐겠으나, 나는 무척 욕심이 많을 때가 있었다. 그건 굳이 물욕에 국한되지 않았고, 정신적인 독점이나 고민의 산물에 대한 공유에 인색한 그런 류였다. 재판에 갈 때 법 공부를 해서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겠다거나 상표권 등록을 할 때 변리사를 쓰지 않고 독학해 문서 작업을 끝장 내려는, 코딩과 영상 편집, 디자인 따위를 배워서 홈페이지를 가꾸려는, 이를테면 그런 것이었다. 수십개 도메인 소유, 기십개 고민 보유 그런 것이었다. 어느덧 2년 전의 거울이다.

하나씩 떼기 시작한 것은, 떼어 내 알몸이 돼야 겠다는 생각을 가진 때부터였다. 아니, 알몸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신을 지향하겠다 마음 먹은 것은 완전히 새로운 삶에 들어가기 위한 연습이라 여겼다. 천성은 있다 생각하나 그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생기려던 탓이다. 사랑이었다.

오늘 또 하나의 이름표가 떨어졌다. 그 이름표를 주운 해외 유력기업은 이제 그 이름표를 되찾는데 이제 기백만원이 들도록 자본의 본드로 자신의 광고판에 붙였다. 그러나 전혀 아쉽거나 슬프지 아니했다. 이별도 사랑이었다.

23세기의 한 해가 질 때

오랜시간 기다렸던 광경이 내게, 썩 기대해본 적 없는 시간이 깊이 머리를 묻을 때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인지 기억할 수 있을까.

헤어진다는 것은 우리 삶에 변하지 않는 명제. 끊어지고야 말 운명.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아픔. 그리고 뻔한 기쁨, 당연한 고민, 가끔씩 해일처럼 덮을 윤달의 고독. 그것이 사랑. 그게 별리別離, 순리와 지연, 어떤 선택의 중간. 사실 엔트로피의 증가. 관계의 적분.

우리는 오히려 불확실성을 종교로 삼기로 했다. 하나에서 시작했으나 서로 다른 이름으로 꾸려진 불안의 공동체를 엮고 묶으니 쉬운 공식이 됐다.

집으로 가자, 결국 아름답게 석양 속으로 무너질.

‘그 자체’인 어떤 이의 동지

내 고향, 아름다운 물이 굽이굽이 있던 땅은 어떤 오해의 장소였다. 다른 사상이 휩쓸고 가면서 칼날이 부서져서 파편이 여기저기 튀던 도시, 조선과 고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은 반도에서 피고 컸으나 내가 자란 도시도 어떻게 보면 또 하나의 작은 반도였고 자연스레 맞닿도록 뚫린 길은 하나, 그 도로는 탈출구였고 숨구멍이었으며 또 분출구였다.

그러나 그 터의 사람들은 물길도 계단이나 왕로로 만드는 기술이 있었나 보다. 과거 수산업의 고장이던 땅은 어느 날부터 밀수로 양태가 자랐고 다시 화학산업을 먹고 물이 올랐으며, 오늘에 와서는 ‘어떤 밤바다’를 노래하는 청년으로 전혀 다른 관광의 이름표를 달게 됐다.

그 바다와 그 길에서 꾸역꾸역 들어온 소문은, 1990년대 어렸던 내게 쉽게 들어왔으니 어떤 사람에 대한 설화였다. 아주 어릴 적 누군가는 섬마을에서 태어나 대통령이 됐다. 그 섬은 외지기로는 괜한 미움을 사 온 이 도에서도 한 손가락에 들 정도고, 그의 산전수전은 참으로 전설적이어서 앞으로도 그를 뚫고 나올 게 어려워진 그야말로 ‘고기준’이 됐다.

그러나 그가 이룬 성과는 동지들의 것이 집대성된 하나의 표상이었고, 우리는 최근 그와 50년을 함께 한 ‘어떤 동지’가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되짚어보면, 그의 ‘어떤 동지’는 ‘그의 어떤 동지’가 아니라 그 자체였다. 시대를 뚫고 편견을 박차고 선 하나의 정신이 있던 것이다.

사람은 그 자체로 어떤 정신이 될 수 있는가. 시대가 가면 어떤 것이든 변하고 닳을 텐데 그 정신은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어떻게 변모할 텐가.

어제 그가 이 땅에 안녕을 고하고 무로 떠나는 마당에서 두 번 고개를 기울였다.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장례란 어디에고 존재하는 것은 아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