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증에 목마른 너에게

이 시간은 낮은 하늘과 더 가라앉아 지나는 구름의 틈 사이로 쏜살같이 빠져나간다 우리는 빛보다 시간이 빠른 것을 알고, 먼 허공에서 네 눈빛이 살아있다는 감정 정도 깨우치지 못해 이렇게 노쇠한 우매에 치여 산다

하루씩 터지는 치자는 늦봄을 깨우는데, 사랑은 어디서 춘곤에 빠져있는가 사랑의 주변에서 꽃말만 쳐다 보면서, 낭만의 동네 연남에서 주말을 기각하며

바닷바람이 그리워 엄마 품이 그리워 아니, 사실 깜빡거리는 먼 바다 등대를 베란다에서 보던 그 분초가 그리워서

우리는 저마다 제목을 지으며

제목짓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은 통신사에서 ‘씨알도 안 먹힐’ 제목을 달아서 올린다. 편집부나 데스크 선에서 훨씬 더 정갈하게 조정된다. 이의는 없다. 나보다 더 오랜 시절 기사를 썼고, 제목 한 글자 차이가 얼마큼 중요한지 이미 뼈까지 아는 선배들이다. 그래서 내가 더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 지워지거나 글자가 조정되더라도, 빈칸 포함 스물 몇 자 안에 본질을 담고 싶은 것이다.

아주 오래 전 고건 전 총리와 관련한 기사의 제목을 기억한다. 명확하지 않으나 ‘髙, Stop’ 이거나 ‘Go, 建’ 중 하나일 것이다. 다시 H모 신문의 이 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이 떠오른다, ‘죽어서 보이지 않는 나는 살았을 때부터 유령이었다’. 또다른 르포르타주 명패도 있다, 다시 그 신문의 ‘환락가 한가운데서 그 시절 치부를 읽는다’.

우리는 애를 써서 글을 짓고 공간에 털고 관심을 바란다. 포장지야 어떻게 됐든 한땀한땀 고급이라 문장을 지었으나 때때로 얼굴은 그대로 두곤 했다. 화장 하거나 성형할 필요는 없으나 눈곱 정도는 떼고 머리에는 물 정도 묻혀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을 테였을 때도 겁을 먹기도 했다.

사람의 시간을 먹는 직업을 살면서, 나는 적어도 앞머리 정도는 만지기로 했다. 애쓴 오늘, 나는 나에게 ‘그래도 열심히 묻고 치열하게 눌러 적은’ 정도 수식어는 붙여주기로 했다.

[화보] 사진기를 받으면서

 

 

아빠는 예술혼이 넘치는 사내였다. 취업하고서, 결혼생활을 시작하고서도 사진기를 놓지 않았다. 피사체는 자연이나 사람에게서 가족으로 변했어도 오래된 네거티브 필름과 인화물을 살펴보면 그 실력은 시대 이상을 품고 있다. 노동부 장관배 노동자 사진대회던가, 오래된 앨범 속에 수상자 이름에는 뿔테를 쓴 아빠가 흑백으로 남아있다.

피는 돌고 도는 게 맞는가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세뱃돈을 몽땅 털어서 코닥 이지쉐어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 내 첫 카메라. 80만화소, 100만화소, 200만화소 수준인 그것을 한참동안 쓰다가 결국 망가뜨리고서 장롱, 안방 장롱에서 일본 니콘사에서 만든 FM2를 발견했다. 첫 수동 사진기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곧바로 찾은 게 사진부였다. 사진예술연구회라는 이름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 거창했으나 그때 배운 가락으로 부장까지 하고, 연이어 청춘을 바친 부대신문에서는 문화부에 이어 사진 전임기자도 지냈다.

그 전후로 나는 사진기 춘추전국의 시기를 보냈다. 감성에 호소하는 로모사의 LC-A부터 당시 고급기에 속하던 니콘사 D1x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캐논사, 소니사, 삼성사의 DSLR, 오래된 명작인 라이카사 M3과 콘탁스, 보잌틀란더를 위시한 RF, 핫셀블라드의 아류인 젠자 브로니카, 롤라이플렉스 등 중형 사진기까지. 당시 중고거래 기록은 끝도 없는 페이지로 대변된다.

어느날은 그런 생각도 한참이나 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흑백으로만 보였으면 하는 그런. 머릿속에는 이미 조리갯값과 셔터속도가 팽이처럼 종일 돌아가고 있었다. 흑백필름 현상과 암실의 닷징, 버닝, 엘리드와 일포드.

여전히 사진과 영상을 사랑하지만, 결이 다른 이야기를 쓰던 나에게 오늘 누군가 당신이 내게 카메라를 쥐여줬다. 누군가였다면 ‘이것 업무 더 시키는 것 아니냐’는 푸념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테지만 나는 그저 고맙고 또 반갑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고팠던 인정을 오늘 나는 받았다.

나는 우산이 없지만 이 비가

서울을 향하는 고속도로에 비가 내린다. 장천마을에서 맞은 몇 방울이 아니라 그래도 땅을 적실만큼, 부족하진 않게 넉넉히 내린다.

길고긴 한주를 마치기 위해 집으로, 세번째 고향같은 연남동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땀에 젖은, 사흘째 입은 옷과 먼지투성이가 돼버린 가방을, 보조배터리와 충전기, 수첩과 수건, 텀블러가 대충 들어차 있는 배낭이 복잡고단한 날을 반증한다.

지난 주말 추위 속에서 핀 벚꽃을 마주한 사람들을 만나고 묻고 썼다. 그치들이 그랬다. “다음주부터 본격적으로 서울에 꽃이 핀다는데, 그 사이에 바람이 많이 불거나 비가 와서 다 지면 어떻게 하냐”고, “그래서 굳이 이번주에 왔다”고.

그들 역시 이 비는 반가울 것이다. 먼저 얻은 사진 때문이 아니라 땅 속에서 숨쉬고 있을지 모르는 잔불을 이 비가 깨끗하게 안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리라고, 나는 믿는다.

과하지 않게 다가가 조심히 묻고, 뒤로는 열심히 찾아대면서 버티려고 한다. 지난 목요일에는 14년 만에 가위에 눌렸다. 피곤하면 때때로 왼쪽 눈이 뿌옇다. 부단히 읽고 심각하게 고민해도 누군가는 그를 쉽게 욕하고 손쉽게 몰아붙이곤 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고개 숙이고 낮게 가겠다.

집에 가는 길, 나는 우산이 없지만 이 비가 좀더 거세졌으면 한다.

이 숙소의 밤은

이 숙소의 밤은 퍽 아름답다. ‘내 고향 여수 바다만 못하다’고 억지를 끼워 자랑하고 싶을만큼, 좋은 밤 불빛은 창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저런, 유혹하는 네온과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이 아닌 불이 오늘 우리와 모두를 미치게 만들었다.

꽤 좋은 버스를 타고 좋은 바다 마을을 왔다. 여름 휴가가 아니라도 정취있는 고장은 항상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이번 마음은 반대쪽으로 지침을 돌린다. 시외버스의 문이 열리자 탄내가 가득했다. 미세먼지 한점 없는 하늘에 불길의 흔적이 푸르게도 남았다.

어젯밤은 2시께까지 잠을 들지 못했다. ‘아무리 빠른 바람도 불이 시·도를 그렇게 넘을 수 있을까’ 겪어보지 못한 어린 사람은 한참 자료를 찾아보다가 2000년, 앞서서 1996년에도 비슷한 화마를 찾았다. 먼발치서 걱정을 하다 잠든 나는 아침 출근길 전화 한통에 결초보은의 고장을 걷고 묻고 적으며 하루를 보냈다. 무척 조심스러웠다, 진정 무척이나.

고속도로에서 만난 붉은 용사들의 행렬, 빗자루를 들고 옆집을 쓸어주는 아저씨, 목마를 테니 물이라도 더 마시라는 병원 직원에 지나가는 사람들 걱정에 여념 없는 목사까지.

오래전 삼풍이 무너진 날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방송에서 유난히 반복했던 것은 내 무의식 아니면 훗날 다시 접한 자료화면은 잔상처럼 흔들렸다. 그 언저리에 끝의 끝까지 남았던 것은 그 와중의 도둑, 사기꾼 그런 사람들.

수천 수만번 흔들리면서 나는 지금 나로 여기까지 왔다. 그렇지만 오늘의 사람은 그때와 달랐다.

자연은, 인간이 만든 기계에서 불이 났으나, ‘스스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스스로 자라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슬픔이 크고 고통은 가시는데 오래될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말이지만 사람들이 도시를 밝히고 있다. 이 도시는 아름답다.

그래도 인터뷰를 잘하고 싶어요

“인터뷰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 길을 가기 시작하면서, 이직을 제안하는 사람이나 ‘어떤 기자가 되고 싶냐’고 묻는 사람에게 항상 하는 말.

우리는 영영 속을 터놓을 수 없을 거예요. 왜냐면 내 이름 앞이나 뒤에 두 글자가 속박 되니까. 쓰고 싶은 가면은 여러 개, 비췄으면 하는 순간은 내가 결정하고 조절할 수만은 없으니까. 모든 동료가 친구가 될 수 없고 모든 너들과 마지막에는 섞일 수 없으니까.

그래도 인터뷰를 잘하고 싶어요. 사람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서툴고 두려움을 느끼더라도요.

그래서 여전히 나는 촌스럽게 펜과 수첩을 들고 있지요. 자주 쓰진 않지만 언제나 주머니 한켠을 차지하고, 주머니 있는 옷만 고르고 가방도 항상 메고 다니지요. 물론 기억력의 쓰임도 그렇게 발달했겠지요.

텁텁한 글씨로, 박히지 못해 떠도는 공간에 콕콕 쑤셔 넣더라도, 그래도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쓰는 사람으로 살게 해주셔서,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여기는 여전히 흐리고, 박하고, 어려워

여기는 여전히 흐리고, 박하고, 어려워.

내 눈이 흐린 줄 알았는데 사실 먼지 때문이었다. 바로 앞 골목 어귀에, 사람이 돌면서 물안개가 흐트러지듯이 흔적이 남은 게 환시幻視로 느껴졌다. 너는 없는데, 네 흔적이 있었다. 이른 오전의 소로小路였다.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젊은 사람이 벌써 폐구閉口에 다가서는 것만큼 외로운 것도 없다지만 너들이 사라진 순간부터 나는 말을 아꼈다. 외로움도 아쉬움도 따뜻한 웃음까지 여전히 둥그런 골목의 곡선을 넘나들지 못하고 있다. 탁 던지면 퉁 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말의 운동에, 나는 연이어 아팠고 기억했던 것이다.

말은 씨앗이라서 가까운 골목에서부터 씨앗을 내려 밭이 됐고, 능청스럽게 빨리 자란 언어의 산물들은 울창한 가림막이 됐다. 연남로3길 골목은 둥지가 됐다. 잘 다듬어져서 편안한 흐름이 아니더라도 온기 정도는 머물던 땅.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공기와 햇볕이 서로 껴안을 만 한 터, 거기에 지금 유령이 흐르고 있다.

삶은 너무 박해서, 온전한 이들을 제값으로 쳐주지 않았다. 마음은 매매가 안 돼서 월세나 전세만 전전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울음을 처음 터트릴 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