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렵게 묻고

어떤 ‘사실에 기반한 글’을 쓸 때, 몸이 아프다. 가슴이 아프다거나 마음이 저리다는 것은 사실 신체의 반응을 수반한다. 실제 혈관이 수축하면서 심근경색이나 편두통을 불러 일으키거나 심각한 지경에는 눈물도 제어가 되지 않는다. 심장이 빨리 뛰거나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한걸음씩, 조금씩, 앞으로. 아니, 내가 앞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체體 지구에서 우리는 각자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어떤 사람이,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에는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하지만, 우리는 어렵게 묻고 쉽게 대답해야 하니까.

남의 것과 내 것, 감정과 사실 사이

어떤 글을 짓기 위해 사실을 갈고 붙일 때 무척이나 오래 걸리는 경우가 있다. 내 것은 오롯이 내게 책임과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남의 것에 손을 댈 때는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최근 과학수사 교육에서 만난 K대 K교수는 그걸 ‘편집증’이라고 했다. 우리같이 글자를 모아 문단을 꾸리는 치 들에게 흔히 있는 증후라 했다. 나는 그걸 조금 꺾어서 증세症勢로 바꿔 불러 보기로 했다.

동료 중 하나는 ‘남의 일’에 슬퍼하지 않았다. ‘남의 죽음’도 안타까운 것일 뿐이거나 빨리 지나가야 하는 사건 중 하나라고 했다. 틀리지는 않은 말이었다. 일은 쏟아지고, 나는 취사선택 해야만 했다. 그것은 때로 어떤 집회에 귀를 대지 못하거나 어떤 아스팔트에 남은 흔적을 보지 못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것을 무척 잘아는 이들 중 몇몇은 서울 영등포구로 눈길을 돌렸고, 때로는 멀고 먼 산귀퉁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사실의 글’을 써서 밥을 벌어 먹었다는 선배 중 몇이나 농촌으로 들어가버렸다는 이야기를 바람 속에서 듣고는 했다.

오히려 감성적인 게 때로 나를 아프게 했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내 알 바 아니’지 못해서 이불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회사에서 내게 빌려준 컴퓨터 타자기에 한숨이 못처럼 박혔다. 담배를 태우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나았다. 머리 위에 구름을 이고 다닐 게 아니면. 언제고 천둥이 치고 비가 흩날릴, 그런 여유를 가질 새가 아니라면.

그래도 써야겠어서, 남기고 박아야 하니까, 다시 몸을 일으키고 증세를 겪었다, 병의 이름표도 보지 못하고.

글은 여러 번 ‘보류’를 당한 끝에 무덤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어떤 문장은 치열하게 다투고서 혓바닥 아래에 다시 잠식 시켰어야만 했지만, 또다른 어떤 바이트Byte를 빚다가 내 것은 무엇이 남았나 잠시나마 고민해봤다.

편의점 도시락 값이 100원 오른 게

가만히 앉아서 해가 지는 소리를 듣다가, 아니 내가 우주를 나는 분위기를 느끼다가 점심에 즐겨 먹어 온 편의점 도시락값이 최근 한 달 새 100원 오른 게 떠올랐다.

편의점은 오래된 슈퍼들을 박멸시키고 건물 아래 자리를 잡았다. 뱀이나 도마뱀이 자신을 키우기 위해 허물을 벗는다 했던가, 점방들은 모두 간판을 던지고 기업의 물류로 옷을 갈아 입었다. 그쯤부터 등장했던 게 1980년대부터 있었다던 ‘슈퍼마켓 도시락’.

내가 처음 편의점에서 먹은 도시락은 3100원인가 그쯤 했다. 그걸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2011년과 2012년, 줄기차게도 편의점 도시락을 먹어대서다. 비싸질 만큼 비싸져서 이제는 라면, 냉면이 1만원권 한 장으로 되지 않을 지경에 다다랐고, 편의점에도 이런 값의 한 판이 등장했으나 그쯤에는 여느 식당 메뉴의 반 값이면 한 끼를 때울 수 있었던 터라 언론사 입사 준비와 대기업 공개채용을 한꺼번에 준비하면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뛰던 내가 좋은 ‘영양섭취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낀 돈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 들어갔다. 기업에 입을 떼기위한 차비로 쓰였다. 때로 취업과 결혼을 벌써 잡은 이에게 둘다 손에 없는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축하의 티켓이 됐으나, 지금보니 참 부질없었다. 그중 절반은 이미 연락이 오래 전 끊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였던가. 편의점에 들어가면 항상 밥값이 궁금해서 돌아보는 게 습관이 됐다. 이 따위 사견으로 공공을 위한 글을 짓진 않을 테지만 이 틈바구니에도 4~5년 사이 참 많은 게 변했다. 2개를 하나로 묶어 파는 삼각김밥은 천천히 종적을 감췄고, 1500원이 넘는 것도 생겨났다. 샐러드가 생겼으나 왠지 모르게 도시락보다 비쌌고 파스타나 짜장면같은 게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느새 값은 천천히 올라 있었다.

가격표를 새로 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사이 천사들이 붙였던 김밥의 가격표는 과거 1000원에서 최대 4000원여까지 택갈이됐고 찌개나 볶음같은 것은 아예 ‘2인분부터’라는 단서까지 덧붙여 1만 8000원이 됐다. 월급은 개미의 눈물에 움튼 이끼에서 탈락한 이파리처럼 조금 올랐지만 말이다.

값이 올랐다는 게 싫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언제까지 어떤 방법으로 또 왜 이 뜨거운 반도가 변해가는지 편의점 식탁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친구가 없고 점심시간이 급한 데다 돈이 너무 궁해서 이런 버릇이 생긴 것은, 전혀 아니다.

‘그 자체’인 어떤 이의 동지

내 고향, 아름다운 물이 굽이굽이 있던 땅은 어떤 오해의 장소였다. 다른 사상이 휩쓸고 가면서 칼날이 부서져서 파편이 여기저기 튀던 도시, 조선과 고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은 반도에서 피고 컸으나 내가 자란 도시도 어떻게 보면 또 하나의 작은 반도였고 자연스레 맞닿도록 뚫린 길은 하나, 그 도로는 탈출구였고 숨구멍이었으며 또 분출구였다.

그러나 그 터의 사람들은 물길도 계단이나 왕로로 만드는 기술이 있었나 보다. 과거 수산업의 고장이던 땅은 어느 날부터 밀수로 양태가 자랐고 다시 화학산업을 먹고 물이 올랐으며, 오늘에 와서는 ‘어떤 밤바다’를 노래하는 청년으로 전혀 다른 관광의 이름표를 달게 됐다.

그 바다와 그 길에서 꾸역꾸역 들어온 소문은, 1990년대 어렸던 내게 쉽게 들어왔으니 어떤 사람에 대한 설화였다. 아주 어릴 적 누군가는 섬마을에서 태어나 대통령이 됐다. 그 섬은 외지기로는 괜한 미움을 사 온 이 도에서도 한 손가락에 들 정도고, 그의 산전수전은 참으로 전설적이어서 앞으로도 그를 뚫고 나올 게 어려워진 그야말로 ‘고기준’이 됐다.

그러나 그가 이룬 성과는 동지들의 것이 집대성된 하나의 표상이었고, 우리는 최근 그와 50년을 함께 한 ‘어떤 동지’가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되짚어보면, 그의 ‘어떤 동지’는 ‘그의 어떤 동지’가 아니라 그 자체였다. 시대를 뚫고 편견을 박차고 선 하나의 정신이 있던 것이다.

사람은 그 자체로 어떤 정신이 될 수 있는가. 시대가 가면 어떤 것이든 변하고 닳을 텐데 그 정신은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어떻게 변모할 텐가.

어제 그가 이 땅에 안녕을 고하고 무로 떠나는 마당에서 두 번 고개를 기울였다.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장례란 어디에고 존재하는 것은 아녔다.

궁금증에 목마른 너에게

이 시간은 낮은 하늘과 더 가라앉아 지나는 구름의 틈 사이로 쏜살같이 빠져나간다 우리는 빛보다 시간이 빠른 것을 알고, 먼 허공에서 네 눈빛이 살아있다는 감정 정도 깨우치지 못해 이렇게 노쇠한 우매에 치여 산다

하루씩 터지는 치자는 늦봄을 깨우는데, 사랑은 어디서 춘곤에 빠져있는가 사랑의 주변에서 꽃말만 쳐다 보면서, 낭만의 동네 연남에서 주말을 기각하며

바닷바람이 그리워 엄마 품이 그리워 아니, 사실 깜빡거리는 먼 바다 등대를 베란다에서 보던 그 분초가 그리워서

우리는 저마다 제목을 지으며

제목짓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은 통신사에서 ‘씨알도 안 먹힐’ 제목을 달아서 올린다. 편집부나 데스크 선에서 훨씬 더 정갈하게 조정된다. 이의는 없다. 나보다 더 오랜 시절 기사를 썼고, 제목 한 글자 차이가 얼마큼 중요한지 이미 뼈까지 아는 선배들이다. 그래서 내가 더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 지워지거나 글자가 조정되더라도, 빈칸 포함 스물 몇 자 안에 본질을 담고 싶은 것이다.

아주 오래 전 고건 전 총리와 관련한 기사의 제목을 기억한다. 명확하지 않으나 ‘髙, Stop’ 이거나 ‘Go, 建’ 중 하나일 것이다. 다시 H모 신문의 이 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이 떠오른다, ‘죽어서 보이지 않는 나는 살았을 때부터 유령이었다’. 또다른 르포르타주 명패도 있다, 다시 그 신문의 ‘환락가 한가운데서 그 시절 치부를 읽는다’.

우리는 애를 써서 글을 짓고 공간에 털고 관심을 바란다. 포장지야 어떻게 됐든 한땀한땀 고급이라 문장을 지었으나 때때로 얼굴은 그대로 두곤 했다. 화장 하거나 성형할 필요는 없으나 눈곱 정도는 떼고 머리에는 물 정도 묻혀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을 테였을 때도 겁을 먹기도 했다.

사람의 시간을 먹는 직업을 살면서, 나는 적어도 앞머리 정도는 만지기로 했다. 애쓴 오늘, 나는 나에게 ‘그래도 열심히 묻고 치열하게 눌러 적은’ 정도 수식어는 붙여주기로 했다.

[화보] 사진기를 받으면서

 

 

아빠는 예술혼이 넘치는 사내였다. 취업하고서, 결혼생활을 시작하고서도 사진기를 놓지 않았다. 피사체는 자연이나 사람에게서 가족으로 변했어도 오래된 네거티브 필름과 인화물을 살펴보면 그 실력은 시대 이상을 품고 있다. 노동부 장관배 노동자 사진대회던가, 오래된 앨범 속에 수상자 이름에는 뿔테를 쓴 아빠가 흑백으로 남아있다.

피는 돌고 도는 게 맞는가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세뱃돈을 몽땅 털어서 코닥 이지쉐어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 내 첫 카메라. 80만화소, 100만화소, 200만화소 수준인 그것을 한참동안 쓰다가 결국 망가뜨리고서 장롱, 안방 장롱에서 일본 니콘사에서 만든 FM2를 발견했다. 첫 수동 사진기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곧바로 찾은 게 사진부였다. 사진예술연구회라는 이름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 거창했으나 그때 배운 가락으로 부장까지 하고, 연이어 청춘을 바친 부대신문에서는 문화부에 이어 사진 전임기자도 지냈다.

그 전후로 나는 사진기 춘추전국의 시기를 보냈다. 감성에 호소하는 로모사의 LC-A부터 당시 고급기에 속하던 니콘사 D1x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캐논사, 소니사, 삼성사의 DSLR, 오래된 명작인 라이카사 M3과 콘탁스, 보잌틀란더를 위시한 RF, 핫셀블라드의 아류인 젠자 브로니카, 롤라이플렉스 등 중형 사진기까지. 당시 중고거래 기록은 끝도 없는 페이지로 대변된다.

어느날은 그런 생각도 한참이나 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흑백으로만 보였으면 하는 그런. 머릿속에는 이미 조리갯값과 셔터속도가 팽이처럼 종일 돌아가고 있었다. 흑백필름 현상과 암실의 닷징, 버닝, 엘리드와 일포드.

여전히 사진과 영상을 사랑하지만, 결이 다른 이야기를 쓰던 나에게 오늘 누군가 당신이 내게 카메라를 쥐여줬다. 누군가였다면 ‘이것 업무 더 시키는 것 아니냐’는 푸념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테지만 나는 그저 고맙고 또 반갑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고팠던 인정을 오늘 나는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