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글씨를 모았다

전투력으로 일하기 싫다. 괴물이 될 수 없다.

어떤 날 아침께 메일을 받았다. 내 글의 일부가 사실과 다르며, 없는 사실을 조작 혹은 왜곡해서 지은 이른바 ‘가짜뉴스’라는 것이다.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했다.

어떤 취재가 떠올랐다. 2만 걸음을 걷고서 낳은 글이다. 보지 않은 것을 찍을 수 없고 듣지 않은 것을 적지 않는다. 그런 글씨의 모음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읽거나 느낀 것은 무엇인가. 물론 글에는 ‘느낀 점’을 담지 않지만, 그게 10할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이 어떻게 글씨만 모으겠는가. 거기 온도가 없다고 하여도.

치솟던 억울한 감정은 오히려 내수면으로 가라앉았고, 가슴에 응어리가 탁 걸렸다. 어떤 글이나 영상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으나 이자도 그중 하나일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어떤 게 좋은 표출일까.

냉정한 손으로 몇 단어를 적었다. 굳이 감정을 싣지 않았고, 깊이 더하려 애를 썼다.

지난해와 또다른 해에 받은 종이들이 떠올랐다. 통지서에는 ‘각하’가 가득했다. 일이 되지 않는 일도, 만들면 일이 된다. 문제를 위한 문제는 어디서든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지 않았고 앞으로 그럴 일도 만들지 않고 싶어서 벽에 붙인 종이는 화석이 됐다.

이 단어를 적는 동안 짧은 내 삶도 함께 되새겨 보았다. 후회할 일은 애초에 하지 않고 싶고, 되지 않는 일은 없게끔 하고 싶다.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상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애 써버리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언제나 생기는 편차 밖 상황과 위양성僞陽性이 이렇게 가끔씩 나를 때리거나 또 흔드는 셈이다.

편지를 띄웠다. 속에 숨긴 말은 그런 것이다. 나는 괴물’까지는’ 아니다. ‘필요없는 싸움’은 필요하지 않다. 또 나도 완벽하거나, 좋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글은 부족하며 생각은 혼란스럽지만 방향은 있다, 적어도.

그런 글씨를 모았다. 엽서에 적었다. 삶을 띄웠다.

환상통幻想痛

내 벽에는 한 장의 종이가 붙어있다. 위쪽만 고정해 둔 탓에 바람에 잘도 날려서 덜렁덜렁 존재를 알리는 종이에는 사건번호와 처분일자가 박혀있고, 내 양심도 몇 줄 걸려 있다.

아주 짧은 글에도 어떤 거짓이 없게 하려는 다짐은 때때로 남들에게 오해가 된다. 사실에 대한 물음은 관계의 왜곡을 부르기도 하고 거짓에 대한 질문은 전쟁의 첨병으로 되돌아 올 때도 있다. 그러나 챙겨야 할 것을 아는 사람이 돼 가는 과정에서, 어제는 그제는 그끄제는 부끄럽게 살지 않았는지 여전히 되묻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부끄러운 적이, 다행히 아직 없었다. 부끄러웠다면 나는, 그랬다면 나는 부끄럽다는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괘씸한 새끼처럼 숨어 버렸을까.

타사의 어떤 후배가 내게 말했다, “칠 수 있을 때 치자”고. “이마저도 못하는 날이 올지, 어떻게 아느냐”고. 어떤 사실이나 답답한 상황에도 방어적으로, 섀우 복싱을 한 적 없는데, 나는. 그래도,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온 방식이 다르면서 때때로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덜렁이는 결과를 보면서, 조금은 웃었다. 고마운 사람들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알까. 전세자금 이자 십 수만 원에도 벌벌 떠는, 속칭 ‘핫플레이스’라고 뜨는 동네에 살면서도 옥탑방이나 다를 바 없는 더위에 얼린 물병을 꼭 껴안고 자는. 도통 넉살이 없어서, 누가 사준 아이스 커피 한 잔, 오천 원 만 원 안팎 간식을 꼬박꼬박 기억하면서 되갚아야 성질이 풀리는. 후불교통비, 전기와 가스 요금을 내면서도 행복하다 생각하는, 그런.

피의 사건 종이를 보다가, 그래도 잘 지내왔다며 짧은 주말에 웃었다. 헛되이 살지 말자, 아직은.